연년생, 같이 키워요
둘째 출산을 얼마 앞둔 시점. 연년생 첫째는 이제 막 걸음마를 하는 14개월 아기였다. 처음에는 출산으로 미약해진 내 몸만 생각하자 하며 당연히 산후조리원에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야 둘째 엄마 중에서도 예비 연년생 엄마! 너무 어린 첫째가 맘에 걸렸다. 커갈수록 점점 엄마껌딱지가 돼가며 이쁜짓만 골라하는 또 한 명의 아가. 내가 얘를 떼놓고 조리원에 간단 말야? 말도 안돼! 이렇게 의식의 흐름이 점차 바뀌어갔다.
주변의 조언도 듣고 맘카페 정보를 미친듯이 서치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방법은 두 가지다. 조리원에 가든지 집에서 조리하든지. 먼저 첫째가 눈에 밟히지만 산후 몸조리는 평생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만큼 중요하니 눈 딱 감고 조리원에 가는 방법이 있다. 아직 갈길이 멀고 먼 육아의 길, 2주는 짧다면 짧은 기간이니 2주라도 확실히 몸조리를 하는거다. 반대로 아무리 옆에서 누가 도와줘도 온전히 몸조리를 할 수는 없겠지만 첫째를 생각해서 집에서 도우미를 쓰는 방법이 있다. 안그래도 너무 빨리 동생이 생겨 불안한 아이를 2주나 억지로 떼어놓는건 나중에 더 큰 후유증을 남길 수도 있다는 의견이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난감한 상황이다.
결정은 각자의 몫인데, 결론적으로 나는 처음 생각대로 조리원을 택했다. 내 몸이 최대한 멀쩡해야 육아의 멀고 험한 길도 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며. 그리고 시댁과 친정이 멀어 평소에는 육아 도움을 받기 어렵지만, 연년생 둘째 출산이라는 대업을 앞두고 감사하게도 지방에 계신 시어머니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막달에 접어들고 언제 애가 나와도 이상할게 없는 시기가 되면서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 상주하러 오셨다. 평소 성격상 시어머니는 물론이고 친정엄마도 불편해하고 혼자가 제일 좋아를 외쳐대던 나였건만, 아기가 태어난 뒤로는 육아의 고단함때문에 귀신이나 원수도 괜찮으니 제발좀 와달라고 반기는 처지가 되었다.
시어머니가 오시니 급격한 환경의 변화가 이뤄졌다. 평생 솥뚜껑 운전을 해오신 내공으로 손끝에서 마술을 부리는지 끼니때마다 푸짐한 상이 척척 차려지고 늘 깨끗한 주방을 볼때마다 우리집 맞나 매우 낯설다. 껌딱지 돌쟁이 데리고 제때 치우는건 사치고, 밥이라도 차리려 하면 엄마가 안놀아준다고 울고불고 하는 애를 방치해둬야 했기에 1식1찬도 버거웠던 얼마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국이다. 여전히 아기와 붙어있고 놀아줘야 하는건 엄마의 몫이지만. 그래서 첫째 데리고는 아무리 산후도우미를 불러도 조리하기 힘들다고 하나보다. 누가 있든 엄마만 찾고 엄마만 따르니. 잠시나마 그 바톤을 시어머니께 넘기고 2주나마 온전히 몸조리를 해서 돌아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아가야, 인생을 살다 보면 2주동안 엄마와 떨어져 할머니와 지내는건 아무것도 아니다. 이보다 더 큰 시련이 허다하니 참고 견뎌야 한다" 이게 14개월 아가한데 해야 할 말은 아닌것 같지만 ㅠ 암튼 앞으로는 직장복귀 등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산넘어 산이어도 잘 넘어봐야지 별 수 있나.
결론적으로 산후조리원에 간 것은 잘 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방법이어서가 아니라,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서다. 아이는 출산과 산후조리 기간동안 엄마와 떨어져지내며 급 데면데면해졌다. 그 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신생아와 함께 갓 출산한 몸으로 아가 둘과 하루종일 씨름하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부담이 상당했을 것이다. 엄마와 갑자기 떨어지고 병원에 있는 엄마는 모르는 아기와 함께있고. 그 상황을 겪었을 첫째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감히 예상할 수도 없다. 첫째는 지금도 기억도 안날 어릴적 함께 지냈던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동생에 대한 질투는 초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폭발적이다. 서로 힘든 상황이 하루에도 열두번씩 벌어지지만 그건 어쩌면 연년생을 둔 집이 평생 안고가야 할 숙제인 것 같다. 그러한 힘듦을 상쇄할정도로 둘이어서 좋은 일도 한가득이니 오늘도 힘내서 잘 지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