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위의 삶, 식지 않은 기억
오픈 준비가 끝나고 직원들과 마주 앉은 미팅자리였다.
점장님이 체크리스트가 적힌 노트를 덮으며 내 쪽을 본다.
"지영 씨, 쫌 집중! 집중!"
테이블을 탁, 탁 두드리는 소리에 내 생각도 깨졌다.
“지영 씨는 멍 때리는 게 너무 잦아요.
일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집중 좀 해주세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힘없이 갈라지는 게, 내 귀에도 들렸다.
잠을 못 잤다거나,
몸이 피곤한 게 아니다.
아직도 어젯밤,
딸아이가 내리꽂은 말속에 갇혀 있다.
“내 인생은 망했어!
아빠 없는 내 인생은 이미 망했어!
평범한 가족이 부러워 미치겠어.
아빠 있는 애들이 너무 부러워.
너무 외로워... 외로워 죽겠어.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돼?
행복하지 않아도 돼...
그냥 다시... 우리 셋이었을 때로 돌아가고 싶어.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울부짖는 아이를 한참이나 끌어안았다.
말이 아닌, 울음으로 붙잡았다.
그 밤, 우리는 끝내 함께 무너져버렸다.
슬픔이 우리 둘을 관통해 온몸에 번져갔다.
'너희를 가여히 여기어 보듬어줌은 없다.
벗어나려 안간힘을 쓴들,
너의 딸은 여전히 슬픔에 방치될 수밖에 없다.
어떤 저항도 받아들일 수 없다.'
움직이지 않으면 가라앉고,
움직여도 빠져나올 수 없는 제자리의 늪이었다.
세상은,
잠자코 시궁창에 처박혀 주지 않는 나에게
사지를 옥죄는 듯 한 고문을 시작했다.
'절망 속에 옴짝달싹 못해야 하는데
희망을 품은 것이 거북스러웠을까.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알고 싶지도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을 내게 던지며,
도대체 무엇을 시험하고 싶은 건데.
언제까지… 이 고문을 견디라는 건데.'
생각에 사로잡힌 채,
끝없이 맴도는 어둠 속에 갇혀버린 듯했다.
어지럼이 밀려왔다.
불빛이 멀어지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온 세상이 정지된 듯, 숨소리만 들렸다.
그때,
“지영 님! 고기, 고기 탔어요!”
옆에서 누군가 다급히 외쳤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불판 위에서는 고기가 시커멓게 타올라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허겁지겁 집게를 들어 고기를 뒤집었지만,
이미 절반은 까맣게 타버린 뒤였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새고기로 바꿔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행히 손님은 괜찮다며 웃었지만,
나는 이미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지영 님, 그 테이블 마무리되면 잠깐 뒤로 오세요."
무전기에서 낮게 깔린 점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목이 잠겨 대답이 겨우 나왔다.
손끝이 자꾸 떨렸다.
타버린 고기 냄새가 여전히 코끝에 남아 있었다.
잠시 후,
식당 뒤편 문을 밀자 고기 굽는 냄새 대신 눅눅한 공기가 확 끼쳐왔다.
점장님은 두 팔을 엇걸고 서 있었다.
“지영 님."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고기 타는 건 실수할 수도 있죠. 근데... 자꾸 멍하니 있으면 어떡해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일합시다."
말끝이 유난히 차가웠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여긴 직장이에요.
계속 이러시면 곤란해요.”
냉정했다. 그 말이 틀린 건 하나도 없는데,
괜히 가슴이 꽉 막혔다.
잘하고 싶은데, 정신을 차리려 해도 마음이 자꾸 엉켜버린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슬픔은 틈새마다 새어 나왔다.
그래서 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점장님이 자리를 뜨자,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굳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같이 일하던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지영 님, 괜찮아요? 적응하느라 많이 힘들어요?”
나는 황급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그래요? 애기 아프다더니, 좀 나았어요?”
손끝이 잠시 멈췄다.
그 질문이, 불쑥 가슴을 쳤다.
“네… 이제 괜찮아요.”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마음 한편이 시큰해 웃음이 비틀렸다.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행이네, 진짜 고생 많아요.”
나는 대답 대신 미소로 넘겼다.
그 미소 속엔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다.
그저 ‘괜찮은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그 순간, 건너편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시선이 머물렀다.
아이 하나가 아빠 품에 꼭 안긴 채 깔깔대고 있었다.
“아빠, 고기가 너무 뜨거워.”
“그래? 그럼 아빠가 호호 불어줄게.”
아빠는 고기를 입으로 불어 아이의 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장난을 치며 고기를 먹는 그들의 모습이
어쩐지 내 기억 한쪽을 건드렸다.
남편이 굽던 고기..
내 접시 위에 올려주며,
“난 내가 굽는 고기가 제일 맛있어. 자기도 먹어봐.
맛있지? 기가 막히지?
우리 고기 다 먹고 옆 아이스크림 가게도 갈까?”
“응! 너무 좋아! 난 빵빠레 먹을 건데, 아빠는?”
“아빠는 하라 거 뺏어 먹을 건데?”
“안 줄 거야!”
다시는 듣지 못할 장난기 어린 웃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평범한 저녁이었다.
지금 내 앞에는 그때의 우리를 닮은 가족이 고기를 먹고 있다.
비슷한 웃음소리, 비슷한 온기.
그 모든 게 너무 닮아 있어서,
순간 숨이 막혔다.
타는 냄새가 아닌,
그리움이 코끝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