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앞에서 다시 살아나다
삶이 이렇게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나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가 죽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차갑게 굳어버린 그를 안고 마지막 입맞춤을 남기며 입관했고,
뼛가루만 남아버린 그의 육신을 부여잡고 꺼이꺼이 오열하며 안치도 했다.
그의 이름 옆에 ‘사망’ 낙인이 찍힌 가족관계증명서도 재확인했다.
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모든 절차를 마쳤다.
그런데도 믿어지지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길고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일까.
멍하니 밖을 응시하곤 했다.
남동생과 싸운 그날도, 실은 그랬다.
바쁠 때는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간이지만 적막함이 와닿는 순간,
여지없이 그가 있는 기억을 더듬었다.
사람들과 함께여도, 난 과거의 세상을 허우적거렸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은
몽롱함이 되어 술을 들이켠 듯 취하게 했다.
나는 그 취기에 자주, 깊이 젖었다.
시간은 늘어지고, 하루는 흐릿하게 번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스멀스멀 욕망들이 밀려들었다.
먹고 싶었다.
입에 뭐라도 넣으면 좀 낫겠지 싶어서. 아니, 그냥 먹고 싶었다.
예쁜 옷도 괜히 뒤적이고 골라 입고,
거울 앞에 서서 표정도 없는 얼굴을 바라보면서도, 그래도 입었다.
그리고 넷플릭스는 또 왜 그렇게 한참이나 고르고
아무거나 틀면 되는데, 뭐가 그리 중대한지.
황당하지 않은가.
슬프다며, 죽겠다 했으면서.
그런데 먹고 싶고, 꾸미고 싶고, 웃긴 거 보고 싶고.
'내 슬픔은 가짜인가.
욕구가 앞서는 나는 가식덩어리인가.
원래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가.'
그 말마저 비겁해서 숨이 턱 막혔다.
이 생각에 결론을 무엇이라 낼 수 있겠는가.
그저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어딜 기댈 힘도, 무너질 용기도 없이,
살아지는 만큼만.
거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가족들이 내 곁에 있었지만, 그 속에서 나는 점점 힘을 잃었다.
그들 덕분에 버텼다. 고마움이 밀려올수록,
나라는 짐을 지운 미안함이 함께 고개를 들었다.
감사와 죄스러움이 뒤엉켜 마음의 중심을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버티게 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곳까지 가라앉아 있었다.
눈 뜨면 절벽 끝에 선 듯 흔들렸고,
숨 쉬는 것조차 죄처럼 느껴졌다.
미안함과 절망이 목구멍에 걸려
토해낼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덩어리가 되었다.
따뜻한 동정의 손길에 얼어붙어 버렸고,
더해가는 자기 연민과 자멸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만든 건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에 남겨진 나였다.
가족은 안심의 울타리였다.
안전하지만, 나를 자라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
그들의 걱정, 연민, 기대에서 벗어나야 했다.
홀로 버티는 법을 배워야 했다.
도망이었는지, 시작이었는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살기 위해,
끝내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나는 떠나야 했다.
누군가의 딸이기 전에,
누군가의 아내였던 사람이기 전에,
나는 다시 나로 살아야 했다.
슬픔의 무게를 짊어지는 법을 배우러
새로운 세상 앞에 서있다.
죽음이 베어낸 자리가 고통에 쓰라려도
참아내야 한다.
내가 알던 삶을 끝내고,
삶을 재정리하기로 했다.
그건 저항할 수 없는 나의 지금이니까.
“이력서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아직 구직 중이세요?”
"네, 일자리 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일 할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다.
나이도, 학벌도, 경력도 어느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다.
“저희는 ○○갈비인데요. 손님들께 고기를 구워주고 서빙할 분을 찾고 있어요.
혹시 고깃집에서 일해 보신 적은 있으세요?
음식점에서 일은 해보신 거 같던데.”
구직앱에 적어둔 경력란이 떠올랐다.
‘습득이 빠르고 적응을 잘한다’ 같은 스스로도 민망한 문장들.
“고깃집은 아직 경험이 없어요. 그래도 금방 배울 수 있어요.”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오셔서 이야기해 보시죠."
"네 내일 괜찮습니다."
"몇 시가 좋을까요?”
'시간, 좋은 시간이란 게 있던가.
하루가 전부 뿌옇고 밤낮이 뒤섞여 있는데.'
“전 아무 때나 좋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 10시 괜찮으실까요?
"네, 괜찮습니다."
"좋아요, 내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면접날, 가게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 직원은 테이블에 컵을 세팅하고 있었고
어떤 직원은 창문을 닦고 누군가는 트레이를 나르고 있었다.
유리문에 비친 내 얼굴은
피곤했고, 무표정했고, 조금은 겁이 나 있었다.
‘여기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목 뒤를 조였다.
이곳은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한다.
내가 뭘 잃었는지,
어디서부터 무너졌는지,
왜 여기에 오게 됐는지.
그 사실이 조금은 안도하게 했고,
한 편으론 더 소외감을 느꼈다.
문이 쓱 열렸다.
“안녕하세요.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돼요.”
검은 유니폼 차림의 직원분이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했고,
익숙하지 않은 조명, 오래된 건물의 냄새와 숯향이 밴 고기 냄새가 엉킨 공기 속으로 발을 들였다.
테이블 한쪽에 앉자, 새침한 느낌의 남자가 내 쪽으로 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점장이고요.
경력을 보니까 고깃집 경험은 없으시더라요."
힘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경험은 없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괜찮아요. 해보면서 배우면 됩니다.
대신 손님들 앞에선 밝은 미소로 대하면 좋겠습니다.”
"그럼요, 그래야죠."
나는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에서 일렁이는 물음표가 파도처럼 일었다.
‘밝음이라..
지금 내 안에 그런 게 남아 있었던가.’
“내일부터 나오실 수 있으세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내 목소리에 아주 작은 떨림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긴장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정말 다시 살아보겠다는 미약한 의지였는지.
아마 다였을 것이다.
나는 나를 모르는 세상 속으로 무작정 뛰어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동안 가슴이 아주 희미하게 떨렸다.
희망이라 부르기엔 아직 이른 것,
다만 나아가겠다는 정도의 작고 조용한 기세였다.
그곳을 나오며 창문에 비친 나를 다시 보았다.
여전히 피곤했고, 무표정했고,
조금은 겁이 나 있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이제 멈춰 있지는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내일 이곳에서, 첫 주문을 받고, 낯선 불 앞에서 어색한 미소를 견뎌낼 것이다.
그게 나를 다시 세우는 길일지,
또 다른 무너짐일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나는 작은 불빛처럼 흔들리며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뜨겁고 번잡한 세계.
그 한가운데서
서서히, 아주 서서히
다시 나를 구워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