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사인을 해본 적이 있나? 물론 있을 것이다! 3만 원 이상 결제 시 필요한 카드 사인, 학교에서 보내오는 유인물에 부모 확인 사인, 또 뭐가 있을까? 없구나... 사인은 내게 딱 그만큼의 의미였다.
그런데 요즘은 얘기가 좀 달라졌다. 내 사인이 창피하다. 뭔가 나만의 멋진 문구 같은 것도 있었으면 좋겠다. 딱 봤을 때 아티스트적인 냄새를 풍기고 싶다. 난데없이 사인 욕심이 생겼다. 왜냐하면 나의 첫 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 <알파 세대를 위한 만능 글쓰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쓰기를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재미있고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글쓰기가 없을까?' 고민을 하다가 '카톡 쓰기', '유튜브 글쓰기', '리뷰 쓰기' 등 요즘 시대에 걸맞은 글쓰기 법을 안내한 책이다.
책을 구입한 지인들이 하나같이 내게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을 해온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사인이 좀... 멋이 없다는 것이다. 미니멀리즘이라고나 할까.
조씨 성을 가진 나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동그라미로 포인트를 주었다고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돌아온 건 비웃음뿐이었다. 나의 사인을 보자마자 남편은 '이걸로 책 사인하기는 좀...'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봐도 참 볼품이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펜을 쥐는 것이 너무 낯설다는 것이었다. 컴퓨터로 원고를 쓰고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니 종이 위에 뭔가를 쓰는 일이 어색했다. 몇 번이고 고쳐 써 보았지만 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글씨라는 것을 제대로 써본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을 만큼 까마득했다. 요즘은 글을 쓴다기 보다, 자판으로 글을 '두들긴다', '친다'라는 표현이 더 맞을 정도로 연필과 펜을 이용해 쓰는 일이 드물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에게 받은 사인들을 쭉 꺼내 살펴 보았다. 그들은 신춘사인회 같은 곳에라도 통과 한 것일까? 김혼비 작가, 이슬아 작가, 어딘 작가, 문하연 작가... 어쩜 글씨도 예쁘고, 메시지도 멋진지, 작가 사인 교실이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등록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사인 연습을 하려면 펜을 잡는 것부터 익숙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지역 도서관에서 하는 필사 모임이 있어 참여 신청을 했다. 또 핸드폰 메모장 대신 다이어리에 손메모를 하려고 애썼다.
카드 결제 사인도, 학부모 확인 사인도 '휙'이 아니라 '휘이이이이익' 정도로 신경 썼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미미한 변화였지만 나만의 방법으로 펜과의 친밀감을 쌓아 나갔다. 넓게도 썼다가 좁게도 썼다가 둥글게도 썼다가 휘날려서도 썼다가 내 손압에 맞는 크기와 모양의 글씨체를 찾아나갔다.
그렇게 쓰는 즐거움을 깨쳐가며 조금씩 글씨에 대한 친밀도를 높여나갔다. 한 자 한 자... 좋은 글귀를 따라 쓸 때 마다 입체적으로 만져지는 것 같은 글의 감촉, 한 획 한 획 그으며 내 이름을 천천히 바라보는 기분, 그것은 컴퓨터 타이핑이나 스마트폰 문자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 같은 만고의 노력 끝에 나의 사인이 완성되었다. 무심한 듯 아닌 듯 멋스러운(?) 흘림체 영문사인, 쑥스럽지만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몇 마디 넣어보았다. 여전히, 그다지, 썩, 마음에 드는 사인은 아니지만 예전보단 많이 발전한 거... 맞죠?
그러고 보니 한 번 지어진 이름은 바꾸기 어렵지만 (개명이 있지만 번거롭고 복잡하다) 사인은 조금만 노력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그 말인즉 지어준 이름에 순응하기 보다 자신이 만들어나간 사인같은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만든 개성있는 사인. 그것은 역학 사주에 나오는 이름에 담긴 운명보다 더 힘이 셀 게 분명하니까.
여러분의 사인은 어떤 모습인가요? 뭐가 됐든, 이건 아니다 싶거든 이 참에 새 사인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지. 사소한 변화가 어쩌면 큰 변화의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또 사람 일은 모르지 않은가. 살면서 갑자기 사인해 줄 일이 생길지. 미리 대비해서 나처럼 뒤늦게 현타가 오는 일이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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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입니다. / 편집 : 최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