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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조 Mar 17. 2022

만국의 30대들이여 힘내자

서른, 서러운 어른의 시간

서른은 어쩌면 ‘서러운 어른’의 준말은 아닐까. 더 이상 사회에서는 나를 ‘애’ 아닌 ‘어른’으로 치부하는데 딱히 이룬 건 없는 것 같아 서러운 나이. 어린 시절 상상해 온 30대와 현생의 괴리감 때문에 서러워지는 나이다. 29에서 30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이렇듯 찬란하게 슬프다.


초등학교 6학년 때다. 하굣길에 나와 친구는 OO고등학교를 항상 지나야 했다. 친구는 교복 입은 언니들을 볼 때마다 “나도 빨리 고등학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 고딩이 돼야 빨리 어른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 문득 상상했다. 내가 교복을 입고, 또 그 교복을 벗어서 어른이 되는 그날을…


상상 속 나는 커리어 우먼이고 기혼자다. 아이는 딱 둘을 낳았다. 퇴근 후 나를 기다리는 잘생긴 남편. 주말에는 중형차를 끌고 시외로 나간다. 우리는 소소한 데이트를 즐기고 돌아와 여느 때처럼 달콤한 사랑을 나눈다. 왜 한때 유행하던 아파트 광고가 묘사하는 그런 화목한 일상. 물론 이렇게까지 디테일한 상상까지는 아니었지만 대충 이런 그림이었다. 확실한 건 상상 속 나의 30대는 결혼을 했고, 꽤 만족스러운 커리어 우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와장창 깨진채 나는 서른을 맞이했다. 그도 그럴 것이 20여년 만에 세상이 많이도 바뀌었다. 그땐 몰랐다. 우리 MZ세대의 취업이 이렇게 족같을 줄은 상상도 못했고, 그 족같은 일자리 문제 때문에 연애도 결혼도 인생의 후순위가 될 줄은 몰랐다. 여기에 신문에서 귀에 피나도록 듣던 그 0.84 !여성이 가임기간에 낳을 것으로 기대하는 합계출산율이 0.84 다. 생애 단 한 명의 아이도 낳지 않는다.


<인구론>을 쓴 맬서스는 그랬다. 인구는 자원과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역사 속에서 항상 조절돼 왔다고 한다. 이 균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2가지로 조절되기도 하는데 바로 1. 본인의 생존욕구 2. 후속세대 재생산 욕구 라고 했다. 그러니까 개인이 먹고 사는 문제랑, 성욕으로 인구가 조절됐다는 말이다.


그렇다. 우리는 섹스를 포기했다.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너무 힘겹다 보니 연애, 결혼 따위로 연결되는 성욕을 내려놓고 있는 ‘서러운 어른’들이 됐다. 한 몸 건사하기 위한 내 집마련도 빠듯한데 뭔 섹스냐. 깔린게 모텔이라지만 그곳에 갈 시간적, 심리적, 경제적 여유도 없다.


청춘들의 서른에 대한 환상은 그렇게 허물어지고 있다. 우리는 교복을 벗자마자 스펙 쌓기에 허덕이고, 시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남들 다 한다는 SNS 한번 깔았다가 박탈감만 오지게 느낀다. 살겠다고 청춘을 바쳤는데 세상은 또 급격히 변한다. 기업은 공개채용을 없애기 시작했고 경력있는 중고 신입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더이상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월급쟁이 보다는 자기 브랜딩이 각광받는다.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이 N잡러를 자처한다. 뭐야 시팔!  ‘안정성’ 하나 믿고 한 우물만 팠는데 이제 T자형 인재가 되라니! 그나마 혜안 있던 유튜버들은 ‘덕분에’ 돈을 끌어 모으고, 조급해진 평범한 다수는 코인을 끌어모은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렇게 부정(否定)의 끝을 달릴 것인가? 아니다. 다만 내가 하고픈 말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각자가 나름대로 제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 아둥바둥 하고 있으니까. 그 나이 때는 이러이러해야 한다~ , 그 나이 정도 되면 얼마 정돈 있어야지~, 어떠한 애인을 만나야지~ 등등과 같은 말, 아니 눈빛이나 은근한 표정 따위도 짓지 말라는 말이다.


근데 따지고보면 요즘처럼 청년 눈치보는 시대에, 그렇게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사람이 있나? 생각해보니 결국 나다. 어쩌면 그러한 압박에 가장 시달리는 건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세상은 내게 관심이 없다. 각자도생하기 바쁘다. 우리가 스스로를 상자 속에 가두어 놓고 옥죄고 있는 건 아닐까?  


그저 당신만의 서른을, 아니 스물을, 마흔을, 쉰을 잘 살아가고 있으면 그만이다. 서럽고 서툴러 자꾸 넘어지더라도 뒤가 아니라, 앞으로 넘어지고 있으면 괜찮다. 자기만의 속도로 멋있고 맛있게 나이 먹는 거다. 과도한 의미부여는 낭비다. 그러니 우리의 나이 말고 연도를, 2022년을 조금 더 기분좋게 반겨주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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