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보인다는 것에 대하여
퇴근길이었다. 저 멀리 집으로 향하는 160번 버스가 보인다. 신호는 간당간당했다. 나는 열심히 횡단보도 위를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버스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 내 뒤로는 젊은 여성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녀도 160번이 목표인 듯 했다. 근데 어쩐지 좀 느리다. 더 빨리 뛰어야 할 것 같은데...
안전하게 탑승한 나는 버스 창밖으로 뒤따라오는 그녀를 예의 주시했다. 여우퍼가 달린 새하얀 롱패딩 차림. 검은색 가죽 가방은 크로스백으로 멨다. 눈부신 패딩 때문인지 유독 돋보였다. 버스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얼굴은 선명해졌다. 마스크를 썼음에도 예쁨이 보이는 외모였다. 그런데 느리다 뭔가 느려... 가만 보니 장갑을 낀 손에 막대기를 하나 들고 있다.
툭툭툭툭. 그녀는 막대기를 두드려가며 마침내 버스 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기사님께 물었다.
“이거 160번 버스 맞나요?”
시각장애인이었다. 이를 나보다 먼저 알아본 기사님은 진작에 버스를 세우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 시간인 만큼 자리는 만석이었다. 노약자, 임산부석도 무의미해지는 그런 최악의 시간. 여기에 사람들은 온통 귀를 틀어막고 스마트폰만을 바라보느라 그녀를 의식하지 못했다. 기사님은 백미러로 노약자석을 살폈다. 그 자리에 앉은 남학생에게 자리를 비켜줄 수 있냐고 했다. 학생은 그제야 그 앞에 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여성을 발견했다. 놀란 눈으로 재빨리 자리를 양보한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손에 낀 장갑을 벗었다. 벗은 장갑을 가방에 넣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더듬거리며 가방 버클을 찾는 손이 세심했다. 딸깍. 장갑을 넣고 닫는 것까지 완성.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이내 창밖을 바라봤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저 여자는 어느 정도로 보이지 않는 걸까? 완전한 암흑일까 아니면 뿌연 세상을 보고 있는 걸까? 가방 단추를 더듬이는 걸로 보아서는 전자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럼 본인의 저 예쁜 외모도 볼 수 없다는 거네. ENFJ의 오지랖인 걸까. 또 감정이입이 과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가 보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문다.
지난해 애인과 <어둠 속의 대화>라는 체험형 전시회를 갔다. 아주 작은 빛조차 보이지 않는 일종의 시각장애 체험이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남녀 주인공들이 처음 만난 장면과 유사하다. 다만 식당이 아니라 2명씩 짝지어 로드마스터의 안내를 받고 체험하는 방식이다.
빛이 어느 정도로 안보일까 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대를 쓴 것도 아닌데 투명 안대를 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참가자들에게는 지팡이를 하나씩 줬다. 나는 한 손은 지팡이를 그리고 다른 한 손은 애인의 따뜻한 손을 잡고 길을 천천히 걸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공포 속에서 '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지 처음 알았다.
걸을수록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에 극도로 몰입하게 됐다. 주변인들의 향기를 좇고 로드마스터의 음성에 촉각은 곤두세워졌다. 해당 전시의 러닝타임은 100분으로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순식간에 흘렀다. 여정이 끝나자 로드마스터는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전시 이후 한동안 ‘익숙한’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남았다. 일상 속 수많은 익숙함 중에서도 시각의 익숙함은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비단 시각 뿐은 아닐테다. 나는 어둠 속 지팡이처럼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부모님의 사랑을 인지하고 있었나. 주변의 소중한 관계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나. 무엇보다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보고는 있는 걸까?
다시 160번 버스, 그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녀와 나는 방금 같은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쩜 그녀는 나보다 더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