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한 게 많은 대한민국 아버지들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을 보면서 나이듦을 실감하고 있다. 출전하는 선수들의 출생연도를 보면 깜짝깜짝 놀랜다. 방금 막 쇼트트랙 1500m 금메달을 딴 황대헌 선수를 검색해봤다. 1999년 생이다. 와우 창창하다!
시나브로 나이 먹는 게 오직 나뿐이었으면 좋았을 런만, 슬프게도 자연법칙은 그렇지 않다. 문득 돌아보니 우리 부모의 노화에도 가속도가 붙고 있었다. 베이비붐 세대인 그들은 이미 육안으로도 희끗희끗하지만, 최근 들어선 깜박깜박하는 일도 늘고 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나이들면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특히 청년 세대들의 힘든 처지를 보여주는 뉴스 앞에서, 때론 고위직 인사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른 사건을 볼 때면 그랬다. 본인이 무능해서, 너희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하고픈 것들을 충분히 지원 못해준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맥락이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 평범하게 자랐는데, 평범한 것만큼 특별한 것도 없으니까. 이 무슨 궤변인가 싶겠지만, 사실 '평범하게 사는 것' 조차도 쉽지 않은 삶들이 (무수히) 많다. 다들 말을 안 하고 내비치지 않아서일 뿐.
그러니까 내가 큰 탈 없이, 평범하게 자란 것만으로도 그는 '유능한 아버지'였다. 이 나이까지 자식들 버리지 않고, 밥 굶기지 않고, 고등교육 무탈히 마치게 하고, 대학 졸업시켜 주신것만으로도 나는, 아니 평범한 우리들은 못해도 은수저는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으레 나이가 들면 못해준 것, 미안한 일들만 생각나나 보다. 이러한 감정은 우리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엊그제 외부 출장을 갔다가 우리 아버지 연배인 부서장님 차를 얻어 타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나는 어른들과의 대화가 어렵지 않은 비교적 쾌활한 성격이었고, 부서장님 역시도 권위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가는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야기 중, 그는 내가 꼭 본인의 막내딸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딸들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어 와이프의 임신과, 아기를 처음 안아보던 그 순간의 기쁨, 딸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는 행복감 등등 수많은 TMI(투 머치 인포메이션)를 쏟아냈다. 분명 투머치인데, 이야기들이 너무나 훈훈한 탓인지 지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딸들을 생각하면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특히 막내딸의 경우는 미술을 전공해서 홍대까지 입학한 재능 있는 아이인데, 본인이 무능해 딸에게 더 충분히 지원을 못해준 것 같다며 말이다.
기시감이 들었다. 동시에 대한민국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식들, 더 큰 범주로는 가족에게 평생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 같단 생각을 했다.
각자의 사연이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그들도 '아빠'는 처음이었다.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게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저 '열심히 일한다고'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테고, 그 스트레스 때문에 가족에게로 향한 크고 작은 실수들도 있었을 테다.
결국 아버지들이 말하는 "미안하다"의 속뜻은 무능이 아니라,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잘 살아보겠다고'만' 달린 것. 그래서 가족에게 소홀했고 때론 상처까지 줬을 지난날에 대한 인간적인, 아주 인간적인 노년의 회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