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생각 #5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것 같은 올해 여름도 조금씩 저물어 가고 있다. 강남 침수라는 충격적인 사건까지 있었던 두 번의 긴 장마에 이어 역대급 태풍이라는 힌남노까지 온다고 하니, 우선 더는 피해를 입는 분들이 계시지 않기를 기원한다.
많은 비는 재난 재해가 되어 여러 물질적인 피해를 주는 것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게 만들어 정신적인 피해를 주기도 한다. 햇볕을 많이 쐬지 못해 세로토닌 분비가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세로토닌 분비를 늘리는데 효과적인 야외 활동을 하는 것도 비 때문에 더 어려워지는 것도 복합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찾아본 비 오는 날 실내에서 우울함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더 찾아봤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정서적으로 많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행복한 감정이 극대화되거나 아니면 따라서 소리 내어 울 수 있는 그런 영화나 음악, 책 등을 보면 세로토닌 분비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다 같이 이 긴 장마와 태풍 기간을 긍정적으로 이겨낼 수 있도록 누구나 좋아하는 로맨틱 영화 속 인상적인 비 오는 장면들을 몇 가지 소개해본다.
1) '어바웃 타임(2013)'의 빗 속 결혼식
오히려 비가 와서 더 행복해지는 영화 연출로 최고의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그 유명한 '어바웃 타임'의 결혼식 장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야외 결혼식의 로망을 뿜뿜하게 만들어서 영화를 따라 야외 결혼식을 했다가 비가 와서 현실과 영화는 다르다는 것을 절절하게 깨닫게 했다는 후기들도 있지만, 그래도 영화로 간접 경험을 할 때 이 장면만큼 보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비 오는 장면도 드문 것 같다. 특히나 비를 맞게 되면 자칫 처량해 보일 수 있는 하얀 드레스가 아니라 빨간 드레스로 연출한 의상 선택과 소품 하나하나의 미장센이 정말 돋보인다. 영국 콘월 지방의 로즐랜드 반도에 있는 Portloe라는 작은 어촌 지역에서 촬영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내년에 영국 여행을 준비하면서 방문하고 싶은 첫 번째 영화 로케이션이기도 하다.
2) '세이프 헤이븐(2013)'의 빗 속 키스신
세상에서 '비를 맞으며 커플이 자신들의 사랑을 확인하는 키스'라는 클리셰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작가는 니콜라스 스파크스가 아닐까? 할리우드가 사랑하는 로맨틱 소설의 대가, 니콜라스 스파크스의 소설에는 단순한 클리쉐가 아니라 서사의 장치로서 작 중 주인공들의 비 맞는 키스 장면이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당연히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들의 이 장면들이 유명할 수밖에 없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장면은 역시 영화의 포스터 장면으로도 활용된 '노트북(2004)'의 노아(라이언 고슬링)와 엘리(레이첼 맥아담스)의 키스신이다. 그 외에도 니콜라스 원작의 '디어 존(2010)', '더 러키 원(2012)', '세이프 헤이븐(2013)' 영화에도 빗 속 키스신이 모두 등장하는데, '노트북'에 비해 그나마 덜 유명한 세 영화 중에서도 '세이프 헤이븐'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서스펜스가 로맨스와 잘 결합되어 다른 두 영화와는 조금 더 다채로운 영화적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영화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사우스 포트에서 거의 풀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3) '미드나잇 인 파리(2011)'의 빗 속 산책 엔딩씬
비 오는 장면을 가장 잘 활용하는 소설가가 니콜라스 스파크스라면 비 오는 장면을 영상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풀어내는 영화감독은 우디 앨런일 것 같다. 아예 비 오는 날을 주제로 한 영화 '레이니데이 인 뉴욕(2020)'을 연출했으니 말 다했다. 비, 뉴욕, 재즈 삼박자가 어우러지는 '레이니데이 인 재즈'도 (우디 앨런이라는 감독의 논쟁적인 사생활을 제외하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지만, 역시나 우디 앨런의 작품 중 비 오는 장면이 가장 극적으로 연출되는 영화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마지막 엔딩 장면일 것이다. 영화 내내 화창한 날씨의 파리의 모습이 두드러지다가, 삶의 가치관과 방향성을 깨달은 주인공 길(오웬 윌슨)이 새로운 사랑이 될지도 모르는 가브리엘(레아 세이두)을 만나게 되는데 갑자기 내리는 비. 그 상황에서 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비 오는 날의 파리가 가장 예쁘다는 가브리엘의 대사와 함께 비 오는 파리를 걷는 둘의 뒷모습은 정말 인상적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를 인생 영화로 꼽는 많은 분들이 이 장면을 따라 하다 감기에 걸렸다는 소문이 있다.
4) '4월의 이야기(1998)'의 빨간 우산
세편의 할리우드 영화들을 보았으니 마지막은 아시아 영화를 한편 보자. 영상미라면 절대 빠질 수 없는 감독 이와이 슌지의 '4월의 이야기'에서도 비 오는 장면이 정말 아름답게 그려진다. 4월이라는 계절에 알맞게 시작의 설렘을 풋풋하게 그려낸 이 영화는 일본의 4월(새 학기의 시작)이라고 하면 상상할 수 있는 여러 이미지들을 정말 아름답게 그린다. 특히나 유명한 벚꽃 흩날리는 거리와 지금 소개하는 첫사랑의 시작을 암시하는 듯한 비 오는 장면이 유명하다. 주인공 우츠 키(마츠 다카코)가 짝사랑하는 선배에게 새빨간 우산을 빌려 거리로 나서며 수줍게 미소 짓는 장면은 사랑의 시작이 주는 설렘이 너무나 잘 드러난다. 이와이 슌지 영화답게 영화 전체적인 이미지가 수채화 같은 느낌이 많은데, 어바웃 타임의 빨간 드레스처럼 쨍한 빨간색의 우산이 이미지적으로 참 강렬한 인상을 준다.
영화에서도 비는 고난이나 역경을 상징하는 장치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늘 소개한 영화들처럼 그 비를 이겨내거나 오히려 즐기면서 더 아름다운 결과물들을 만들기도 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자칫 우울해지기 쉬운 이 시기를 모두 잘 넘어가면 좋겠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