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예술을 먹고 자랐단다
아이를 가지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친구가 말했다. 그렇긴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그래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반드시 지금이어야만 하는 꿈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어쨌든 출산이 그 기회를 박탈할까 두려웠다. 뭐 그리 대단한 기회인지는 나도 모른다.
세상에 즐길거리가 너무 많았다는 게 문제였다. 맛있는 음식, 해외여행, 멋진 예술 작품들, 신혼 생활은 그런 것들로 가득 찼다. 둘이 벌어 둘이 쓰니 사치는 충분히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감흥은 예전 같지 않았다. 유럽 여행도, 오마카세도, 편집샵도 두 번째는 처음만 못했고, 세 번째는 두 번째만 못했다. 갈수록 물가는 올라서 내는 돈은 많아지는데 어쩐지 감동은 야박해졌다. 인플레이션이 화폐에만 있는 게 아니구나.
어떤 날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내가 불쑥 아이를 갖자고 했다. 그간 아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었기에 아내의 말은 갑작스러웠다. 신혼생활이 권태로웠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내도 감흥의 인플레이션을, 그리고 곧 서른 중반이라는 은근한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염두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인생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인연이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두 번의 유산을 겪었다.
첫 번째 유산을 겪고 우리 부부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두 번째 유산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눈물을 보이면 무너질 것 같아서, 상처 난 아내의 몸과 마음을 한 번 더 할퀴는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대신 현실적인 해결을 찾았다. 난임 병원을 갔고, 거기에서 주는 주사를 아침마다 배에 놓았다. 다행히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렵지 않게 세 번째 임신이 되었지만, 겁이 나서 아무에게도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임신을 유산으로 바꿔 말하는 것은 두 번이면 족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건강히 태어났다. 아버지라는 새로운 정체성은 내 혈관 곳곳에 퍼졌고,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었다. 적극적인 양육자가 되고 싶어 육아휴직을 냈다. 그게 벌써 한 달이 되었고, 아이는 새벽에 깨어나 밥 달라고 울고, 재워달라고 운다. 이걸 두세 시간마다 아내와 번갈아 하다 보면 '내 삶'이 그야말로 사라졌다는 것을 절감한다. 수면과 육아, 두 가지 말고는 들어올 틈이 없다. 정말이지, 과장이 아니다.
아이를 가지면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친구의 말은, 당연하게도 사실이다. 머리론 알고 있었지만 막상 수면 부족에 시달리면 그 원초적인 고통이 얼마나 압도적인 것인지 깨닫는다. 하고 싶은 게 많은 나는 그 한계감을 유독 도드라지게 느낀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일상을 되찾아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잠이 부족해 눈꺼풀이 무거워도, 운동을 하고 자투리 시간에 글을 썼다. (지금 이 글도 그 증거다.) 그러나 그게 지속할 수 없는 발악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였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궁리하다가 돌연 생각이 멈췄다.
나는 대체 그 시간에 뭘 하고 싶길래 시간을 원하는 거지? 운동하고 글 쓰고 그런 것들? 그게 뭔데? 그게 왜 중요한데? 나도 몰라. 어쩌면 그저 이 고생을 피하고 싶을 뿐일지도 몰라.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무 책임도 지고 싶지 않고, 흥청망청 시간 낭비해도 여전히 넉넉히 남아돌았으면 좋겠어.
나는 아직 아빠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걸지도 몰라.
숨을 고르려 아이를 안은 채, 박선아 작가의 <우아한 언어>를 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친구는 취한 나를 동영상으로 찍어두었고 영상 속 나는 친구에게 퀴즈를 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데, 오늘 같은 밤에 있으면 너무 좋은 것은?" 친구가 몇 가지 답을 할 때마다 "땡"을 외치더니 마지막에 정답을 알려준다며 "예술!"이라 말한다. 친구는 예술병에 걸렸다고 웃고 나는 너무 좋다며 깔깔거리고 웃는다.
예술. 그 단어에 한동안 머물렀다. 익숙하지만 낯선 것. 갈망하지만 닿지 못하는 것. 어디에든 있지만 좀처럼 찾기 힘든 것.
언젠가 아내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어? 아내는 말했다. 예술이 있는 삶을 살고 싶어. 그 말이 듣기 좋았다. 예술은 솜사탕 같이 폭신하고, 오리털 이불처럼 따뜻하고, 우유거품처럼 부드럽게 삶을 어루만질 것이니까. 그것에 나는 심히 동조했다.
예술이 있는 삶은 충분히 누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아니, 이미 어느 정도 닿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니까. 요리를 하고, 집을 꾸미니까. 예술이 뭐 별 건가? 그때는 그게 쉬웠다.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는 그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걸까. 육아와 수면에 밀려서일까. 그냥 나이를 먹어버린 걸까.
밑도 끝도 없이 시간만 찾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 시간은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없다. 향기도 없고 풍경도 없고 리듬도 없다. 그냥 도화지고, 맨밥이다. 거기에 멋과 맛을 더하는 것 것은 예술이다. 예술이 빠진 식사는 끼니지만, 예술이 더해진 식사는 요리가 된다. 예술이 빠진 옷은 보온을 하지만, 예술이 더해진 옷은 표현을 한다. 예술이 빠진 목욕은 세신이지만, 예술이 더해진 목욕은 명상이 된다. 예술이 빠진 출근길은 혼돈이지만, 예술이 더해진 출근길은 풍경이 된다. 예술은 많은 것을 바꾼다.
곤히 잠에 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미래를 상상하곤 한다. 상상 속의 아이는 나에게 무언가 말한다. 아내가 뭐라고 말하고, 나도 무언가 말한다. 웃으며, 때로는 진지하게 셋의 입술이 뻐끔거린다. 이 광경에 오디오는 없다.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게 늘 궁금했다. 미래의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오늘은 조심스럽게, 서서히 볼륨을 올려본다. 셋의 대화가 조금 들리는 것 같다. 우리는 분명, 예술에 대해 떠들고 있다. 해 질 녘 노을이 셋의 얼굴을 비춘다. 잔잔한 재즈가 들린다. 웃음과 탄성이 반복된다. 공기는 따뜻하고, 포근하고, 부드럽다. 우리의 시간은 완전히 예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