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좋으니
아내가 하나둘 모아왔던 물건들이 빈틈없이 차있던 곳들에 숨구멍이 생기고 있다. 아내는 입지 않는 옷들과 신발을 부지런히 처분하고 있다. 세상이 좋아져서 '당근(중고거래 앱)'에서 일 대 일로 거래하기도 하고, '차란(세컨핸드 앱)'에 한꺼번에 보내 판매하기도 한다. 이것도 팔리려나 하는 옷들도 의외로 금세 팔려버려서 제법 만족스럽다.
만족스러운 것은 옷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볕이라고는 한줌도 들지 않는 옷장에서 수년을 갇혀있었던 옷들이 다른 손으로 옮겨가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내는 그 떠나보냄을 서운해하지 않고 오히려 홀가분해 했다. 알게 모르게 아내도 그 옷들에게 가졌던 애정이 죄책감 비슷하게 변하던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리라. 역할을 가진 것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바짓가랑이를 잡고 있는 것이 결코 애정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 말이다.
모든 것은 역할을 잃을 때 생명력을 잃는다. 몇 달 전에 제법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도 같은 이야기다. 김 부장은 젊은 시절을 다 바친 회사에서 역할을 잃자 생명력을 잃었다. 김 부장에게 감정 이입을 하던 비슷한 연배의 남성들에게는 비극으로 보였고, 그런 김 부장을 가질 것 다 가진 기득권으로 보던 사회 초년생 남성들에게는 조롱으로 보였다.
젊은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진짜 비극은 <서울 월세에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 사원 이야기>라고.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김 사원을 보며 같은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진짜 비극은 <서울 고시원에 아르바이트 하는 김 알바 이야기>라고. 그리고 또 진짜 비극은 나타나고, 서로의 불행 배틀은 점점 격렬해진다. 진짜 비극이란 무엇일까. 그런 게 있기는 한걸까.
모두가 비극에 처해있다. 김 부장도, 김 사원도, 김 알바도, 모두가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 고통의 무게를 달아 누구의 것이 더 무거운지 알 수 있다면야 서로 비교하며 불행의 자웅을 겨뤄도 되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고통을 가장 큰 것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타인의 비극은 내게 비극이 될 수 없으니, 서로의 불행을 비교하는 것만큼 승자 없는 게임은 없을 것이다.
불행만 들여다보면 답이 없다. 비대해진 불행의 이면에 있는 쪼그라든 '역할'에게 눈길을 주면 어떨까. 절대적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이라 해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고 무언가에게 기여할 수 있다면, 제법 버틸만한 힘이 생긴다. 반대로 누가봐도 넉넉한 상황이라고 해도, 제 역할을 할 수 없다면 서있을 힘도 없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 안다고 해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불행만 보이는 눈은 계속 불행만 볼 수 밖에 없고, 없던 역할이 마법처럼 툭하고 튀어나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은 생긴 대로 살고, 살던 대로 생각할 수 밖에 없으니, 이루어지지 못할 헛된 희망은 가지지 않는 것이 낫다.
하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역할에 대해 한 번 되짚어 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게 소중한 사람은 없는지, 나를 필요로하는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아주 작더라도 찾아낸 그 역할로 오늘 하루를 버틴다. 역할이 있음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