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해주지 않은 것

말해준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겠지만

by 조성현

나도 내가 잘해낼 줄만 알았다. 딸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주변 사람들이 내가 이미 아이를 몇이나 키워본 베테랑 양육자인 것처럼 말했으니까.

"내가 조성현 딸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육아휴직 끝나면 전업주부한다고 복직 안 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나도 좋은 아빠는 따놓은 당상인 것처럼 우쭐거렸다. 하지만 막상 시작된 육아는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힘들 줄은 알았지만, 뭐가 어떻게 왜 힘들지 몰랐으니 결국 아는 게 아무것도 없던 셈이었다.

가장 의아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사람들은 왜 육아가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갓난아이의 울음이 어떻게 고막을 난도질하는지, 여러 조각으로 토막 난 새벽잠이 눈과 머리를 어떻게 쥐어짜는지, 하루에 나는 얼마나 존재할 수 있는지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차마 아이를 낳지 말라고 할 수는 없어서 말을 삼켰던 걸까.


저출산의 늪에 빠진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몰라서 그런 것이다. '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아이를 낳았을까' 하는 물음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부모의 자격이 없는 것 아니냐'라고 자책하는 것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 아무리 봐도 자격이 없는 게 맞으니까. 숭고하고 거룩한 육아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지 않는 나는 불경한 아버지가 된다. 대신 딩크 부부는 매국노가 아니라 냉철한 자기객관화를 하는 똑똑한 사람이 된다.


어디선가 "자아가 비대한 사람일수록 육아가 힘들다"라는 말을 들었다. 육아의 고됨을 관통하는 문장이라고 인정한다. 문제는 내 자아가 얼마나 비대한지는 육아를 해봐야 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때부터는 비대한 자아를 조금씩 죽여야만 한다. 내가 죽을수록 아이는 더 크게 자라난다.

나를 죽이다 보면 그동안 집착해온 정체성을 잃는다. 잠깐, 내가 정체성에 집착했던 적이 있었나? 성실히 출근하고, 퇴근길에 운동하고, 아침에 신문 보며 커피 한잔하는 평범한 소시민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직업인으로서의 목표, 건강에 대한 통제욕, 간섭받지 않을 자유, 이 사소한 것들 모두가 집착이 된다는걸. 그것들이 죽어야 내 아이가 산다는걸.


소설가 김유담은 육아에 대한 산문집 <돌봄과 작업 2>에서 '소설 쓰는 사람에게는 티슈처럼 한 장씩 꺼내 쓰는 시간이 아니라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감아 꺼내듯 길게 늘이고 늘여서 쓰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라는 선배 작가의 말을 인용한다. 그러나 육아 노동은 시간을 잘게 쪼개다 못해 가루를 내버리니,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육아를 양립시키고자 하는 몸부림은 안쓰럽다못해 애처롭다. 이것을 직접 겪고 있노라면 '경력 단절'이라는 피상적 사회 현상, 그 심연에 있는 '정체성 소멸'에 대한 이야기가 보인다. 육아를 위해 나를 점점 죽이다보면 내가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를 죽이는 대신 아이가 자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숭고한 아가페란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나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나부터 바로 서야 아이를 챙길 수 있다고 말한다. 둘 중에 정답은 없으며, 단지 자아의 비대함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 육아를 하려거든, 본인의 자아에 대해 한 번쯤은 숙고해봄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봤자 어차피 모르겠지만.


FE3206C9-14E0-4ADB-94F3-39C16FE37CF0_1_105_c.jpeg 예뻐 죽겠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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