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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죠기 Jul 27. 2019

엘 보른 골목 탐방

바르셀로나 한 달 살기 - 카딸루냐 알아가기

바르셀로나에서의 시간이 며칠밖에 되지 않는 관광객들은 피카소 미술관이나 카탈루냐 음악당 정도로 엘보른(El Born)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바르셀로나에 처음 방문했던 나도 지도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피카소 미술관을 찾기에 바빴으니까. 랜드마크에만 목적을 두고 무심히 지나쳐 가기에 엘보른은 너무 매력적인 곳이다


나 역시 그 매력을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엘보른 지구는 핫 한 상점들과 레스토랑, 바가 가득해서 밤이고 낮이고 현지인 관광객 모두의 발 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 지역을 의미하는 공식 명칭은 따로 있지만 중심에 자리 잡은 엘보른이란 길 이름을 이 지구 전체의 별명처럼 사용한다고 한다.


고딕지구와 함께 중세시대 때부터 있었던 이 지역의 길들은 수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낮에는 트렌디한 옷가게와 다양한 공방들, 소품점들이 당신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고 밤에는 골목마다 영롱하게 빛나는 작은 불빛들이 낭만과 로맨스를 원하는 그대들을 엘보른의 골목골목으로 유혹할 것이다.



알베르토와 함께 하는 "카탈루냐 알아가기" 


책과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난들 혼자서는 알아가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현지인과 함께 하는 소그룹 엘보른 투어를 신청했다. 역사 위주의 딱딱한 아닌 숨겨진 장소와 이야기들을 찾아다니고 타파스를 나누며 자유롭게 로컬의 기분을 경험해보는 프로그램이다. 


#1.
스파클링 와인 한잔과 하몽, 토마토와 빵을 곁들인 판초스를 나누며 서로의 면식을 익혔다. 우리가 둘러앉은 장소는 로컬 아티스트들의 작업실을 제공하는 기관에 딸린 커피숍이다.


예술가들에게 이 공간과 기회를 제공하는 기관은 카탈루냐 예술 진흥을 위한 단체라고 한다. 최근까지도 여성 예술가에 대한 지원은커녕 여자는 직원으로 쓰지 않을 정도로 아주 보수적인 단체였다고 하니, 꽤나 의외이다. 이토록 억압에 저항하고 자유를 외치는 카탈루냐인데 말이다.


#2.
바로 얼마 전이었던 4월 23일은 바르셀로나의 밸런타인데이인 산 조르디 축제일이었다. 길거리는 온통 조르디 성인의 상징인 빨간 장미로 뒤덮이는 로맨틱한 날이다. 세계 책의 날이기도 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남자는 여자에게 장미꽃을 선물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왜 두 개 다 주고받지 않냐고? 


책은 자고로 남자를 위한 것, 여자에겐 지식이 아닌 아름다운 장미면 족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장미 뒤에 숨겨진 억압의 과거를 듣자니 마냥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내게는 장미로 충분하지 않다. 장미의 아름다움은 시들어지기 마련이다. 



#3.
바르셀로나의 모든 축제에 동원된다는 대형 인형들(gigante)이 모여있는 전시관이다. 모두가 이 지역에 기반해서 창조된 인물이며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바르셀로나의 축제에서는 그들만의 서사가 기억되고, 재생산된다. 지방 고유의 복장과 깃발도 동원된다.

최근의 카탈루냐의 독립을 위한 정치적 운동과 행사들까지 생각하면 카탈루냐의 정체성이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회자되고 강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안내자 알베르토가 오늘날의 카탈루냐 인들이 역사적 순간을 살고 있다며 가슴 벅차 하는 모습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Casa dels Entremesos"   lacasadelsentremesos.cat


그나저나 카페에서 나눈 대화에서부터 이 전시관까지의 내용을 보면 엘보른 투어라기 보단 "카탈루냐 알아가기"정도로 투어 이름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4.
투어에 함께 한 참가자들은 나까지 네 명이었다.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이자 살사댄스 강사 독일인, 스페인 국내 정치부터 북핵문제나 한국의 평화협정까지.. 정치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두 번째 동행은 알바니아서의 탄압을 피해 레바논으로 이주한 크리스천 가족의 후손. 그의 모국어는 프랑스어이지만 아랍어와 영어 그리고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한다니, 그가 이해하는 문화의 다양성과 깊이는 수준이 다르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함께 여행을 온 여자 친구와 함께 미국에 거주하고 있단다.
세 번째는 외국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른다는 전형적인 아메리칸이다. 미국인답게 호탕한 웃음을 뽐낸다.
그리고 한국에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새로운 활력을 찾아 지구 반대편까지 떠나 온 나. 
직업도 사회적 위치도 나이도 나를 규정하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고, 소통하고, 표현될 수 있을까.


#5.
여행지가 아니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각자의 사회가 규정하는 자신의 역할과 지위를 내려놓고 다양한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빛나는 조명 아래 앉아 타파스를 나누는 즐거움, 우리의 대화 소리는 엘보른의 매력을 더 한다. 반짝, 여행의 빛나는 순간이 하나 더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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