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지구의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유난히 사람들이 몰려 있는 이 곳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하게 될지 모른다. 얼 핏 보면 여느 광장과 다를 것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북적대는 관광객들 만큼 산펠립네리 광장(Plaça de Sant Felip Neri)에는 사연이 가득하다.
정면에 보이는 성당은 가우디가 매일 빠지지 않고 기도드리던 성당이라고 한다. 74세의 가우디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성당에 다녀오는 길에 전차에 치이는 사고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 된다. 가우디가 날마다 무릎 꿇었던 성당의 모습은 어떨지 그 내부가 궁금했으나, 이 성당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열고 닫지 않는다 하니 운이 좋은 사람이라야 들어가 볼 수 있겠다.
동족상잔의 비극, 이데올로기를 달리하는 세계열강들의 대리전은 우리나라만의 역사가 아니다.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 장군을 지원하는 무솔리니 집권 하의 이탈리아군은 좌파 성향의 도시였던 바르셀로나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고, 산필립네리 학교에 있던 어린아이들 스무 명을 포함한 민간인 42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폭력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광장의 벽에는 탄흔이 그대로 남아 있고, 산펠립네리 학교에서는 매일 오후 아이들을 이곳 광장에 나와 뛰놀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고 한다.
폭력과 상처의 공간이 아이들의 활력으로 채워지고 있다.
산펠립네리 광장이 담고 있는 비극적인 사연 때문인지 이 곳은 영화 향수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영화의 주인공 그루누이는 과일가게 아가씨의 거부할 수 없는 향기에 이끌려 이 광장에 이르고 그 향기에 취한 광기에 의해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루누이의 욕망을 일깨우는 장소, 본격적인 비극이 시작되는 배경이 바로 이 곳이다.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이유로 여기에 왔지만 저 마다 광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앞에서 귀를 기울인다. 이 비극과 슬픔의 역사 앞에 선 관광객들 사이에는 일종의 숙연한 감정이 공유되고 있는 것 같다. 분주한 바르셀로나 관광지의 중심에 위치한 산펠립네리 광장이 유독 조용하게 느껴지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