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한 달 살기 - 어디든 살아볼 수 있다는 행복한 고민
먼저, '어디에 살아볼 것인가'를 정해야 했다.
실패 없는 선택을 위해 처음 가는 도시보다는 이미 방문했던 도시 중 다시 가고 싶은 곳을 고르기로 했다. 부지런히 여행을 다니면서 한 달 정도는 살아봤으면 좋겠다 싶었던 도시들이 있었다.
유럽 대륙의 끝에서 대서양의 거친 바람을 받아내고 있어서일까? 리스본의 건물들은 유독 낡아 보였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바람에서는 쌀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리스본은 도시와 시골의 적당한 타협점인 듯 보였다. 대도시의 화려함과 북적거림에서 잠시 벗어나 조금 더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 머물 수 있을 것 같았다.
☺️ 도시 치고는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물가 부담이 없다. 담백한 생선구이를 실컷 먹을 수 있다.
� 관광지를 벗어나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산책을 즐기기엔 언덕이 너무 많다. 한 달을 지내기엔 지루할 수도 있을 법하다.
많은 이들이 파리에 낭만을 품고 있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암스테르담이 그런 도시다. 합리적이고 지적인 사람들,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 멋을 낼 줄 아는 사람들이 저 다닥다닥 늘어선 집들에 살고 있을 것 같다. 문 밖에 나오면 카날이 조용히 흐르고 있을 그런 집에 한 달 동안 살면서,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누비고 싶다. 이 글을 쓰면서도 암스테르담의 장점에 대해서 한참 고민해보지만 쉽게 정리되진 않는다. 이유 없는 호감. 누구나 그런 환상의 도시 하나쯤은 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 낭만의 도시에서 살아볼 수 있는 기회다.
� 카날에 늘어선 집들 중에 숙소를 구하기엔 렌트비가 엄청나다. 생각처럼 멋들어지게 살기엔 물가가 너무나 팍팍하다. 실제로 지내다 보면 암스테르담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지적이거나 합리적이거나 세련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나의 환상이 산산이 부서질 수 있다.
그동안 유독 나와 인연이 많았던 독일. 프랑스나 스페인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알면 알 수록 장점이 많은 나라이다. 독일에 머문 기간을 모두 합치면 1년 가까이 될 정도로 곳곳을 다녔지만 베를린은 유독 다양한 매력을 가진 도시로 다가왔다.
전쟁과 분단이라는 상처가 아직도 도시의 기저에 남아있는 듯했고, 그 토양 위에는 반성과 화해를 씨앗으로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열망이 무성히 자라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시는 오래되었지만 젊은 기운이 느껴졌고, 파괴적인 과거 속에서 창조적인 문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거친 듯 보이는 이 회색 도시에는 과거와 현재가 연속성 있게 공존하고 있었다. 의미 있는 한 달을 보낼 수 있는 장소임에 틀림없다.
☺️ 물가가 저렴하다. 도시가 크고 여백이 많아 답답한 느낌이 없다. 동네마다 다른 분위기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트렌디한 카페나 상점, 갤러리가 많다. 젊은 사람들이 많고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모임이나 액티비티가 많다. 언어가 잘 통한다.
� 산과 바다가 없다. 어떤 면에서는 서울과 비슷한 느낌일 수도 있고 독일 문화는 익숙하기 때문에 새로움이 덜 할지도 모르겠다. 치안이 우려되는 동네도 있다.
4. 샌프란스시코
행복했던 추억들이 겹겹이 쌓여있는 샌프란스시코, 여행을 계획할 때면 매번 다른 새로운 여행지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게 만드는 도시이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금문교를 건너 소살리토까지 달려보고 싶다. 오르막길에서 관성을 이겨내지 못했던 10년 전,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운동으로 체력을 단련했으니 그때의 굴욕을 만회하리라. 바다보다도 더 차가워 보이던 하늘 아래서 반짝반짝 빛나던 바다,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다웠던 오션 비치에도 다시 방문하고 싶다. 하루에 한 번씩 질릴 때까지 인 앤 아웃 버거를 먹을 것이다. 한 달을 지낸들 결코 실망할 일이 없다. 샌프란시스코의 활력이 필요했다.
☺️ 최애 도시다.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 하이킹을 할 수 있는 적당한 언덕들, 그리고 탁 트인 태평양 바다, 모든 요소가 갖추어져 있다. 도시가 너무 크지 않아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다.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동네마다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이나 할 수 있는 활동도 다양하다.
� 물가가 치명적인 단점이다. 실리콘밸리의 IT기업과 스타트업 붐으로 엄청난 자금이 몰려들면서 안 그래도 높았던 물가가 더 높아졌다고 한다. 때론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들(안타깝게도 주로 말 많은 아저씨들이다..)때문에 귀찮아지거나 곤란해질 수 있다.
5. 바르셀로나
스페인과는 인연이 별로 없었다. 지난번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는 제대로 여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컨디션이 바닥인 상태였다. 다시 돌아가 제대로 만나보고 싶었다.
☺️ 풍부한 먹거리, 풍부한 액티비티, 풍부한 문화유산, 뭐든 풍부하다. 산도 바다도 다 갖춘 도시다. 물가가 적당하다. 날씨가 좋다. 원한다면 메시의 축구경기를 볼 수도 있다.
� 굳이 꼽자면 작은 도시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 정도를 꼽겠지만, 이것도 바르셀로나에 다녀온 뒤에나 알게 된 점이다.
며칠의 여행이 아니라 한 달을 지내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자연환경, 언어, 물가, 치안, 즐길 수 있는 활동이나 문화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을 고려해야 했지만 결정을 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바르셀로나는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갖춘 듯했다.
이제 곧 지난 몇 년간 반복해온 쳇바퀴 같은 일상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지구 반대편 어디선가에서 한 달 동안 지낼 생각만 해도, 내 속엔 이미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듯했다. 건강을 이유로 퇴사한다지만 퇴사 날짜가 정해지자 오히려 피부는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