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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 신의 직장에 사표를 던지다.

바르셀로나 한 달 살기

by 죠기

신의 직장에 사표를 던지다.


퇴사를 결심하기엔 '워라밸'이 너무나 완벽한 회사였다. 지사장님에게도 거리낌 없이 소신발언을 할 수 있는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업무 문화, 업무 외 시간을 철저히 존중해주지만 인간적인 애정까지 결핍되지는 않았던 회사였다. 칼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권리였고 휴가는 1년에 5주 가량, 물론 언제든 눈치보지 않고 쓸 수 있었다. 몇 주간 장기 휴가를 갈지라도 휴가 때 업무로 연락을 하려는 시도는 굉장한 실례로 여겨졌다. 급여는 매년 눈에 띄게 올랐고 퇴사 무렵엔 대기업 못지 않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깨닫지만 남들이 말하는 신의 직장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떠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건강 문제였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팀장'이란 직책이 주어졌고 중간관리자로서 처하는 새로운 상황들은 적잖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위에서 받는 압박과 무능력한 팀원 한 명으로 인해 번번히 느낄 수 밖에 없었던 답답함은 어디로 분출되지 못한 채 내 안에 꽉 막혀있었다. 그런 기운이 결국은 아토피 피부염이라는 형태로 터져버렸던 것 같다.


화는 위로 향한다고 했던가. 유독 얼굴에만 피부염이 생겼는데 몇 달이 지나도 증상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언제 낫는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얼굴 뿐 아니라 내 마음과 정신도 메말라가고 있었다. 웃는 상이었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갔고, 친구들의 일상적인 대화가 내게는 더 이상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지기 까지 했다. 건강하지 않으니 아무리 워라밸이 보장된다 한들 라이프를 즐길 수 없는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의 직장을 찾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수개월을 고민했지만 결국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기로 빛나야 할 젊음의 시간. 안주할 것이 아니라 삶의 활력을, 기쁨을 되찾아야 했다.



결국, 최고의 치료제는 퇴사


퇴사 의사를 밝히고 인수인계를 위해 한 달 정도는 더 출근을 하기로 했다. 언제까지 쳇바퀴 같은 생활을 반복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답답해지곤 했었는데, 막상 끝날 날이 정해지니 출근 길은 마치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며칠 앞둔 학생의 발걸음 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짧지 않은 시간을 버텨냈고, 이제는 후회 없이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는 데 내 스스로가 대견했다. 모두가 호의적인 마음으로 인정해주고 격려해주어 고마운 마음이었다.


인수인계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틈틈이 퇴사 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직이 아닌 여행을 위한 행복한 고민이었다. 학생 때는 돈이 부족해서, 직장인 때는 시간이 부족해서, 이래저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미뤄왔던 '한 달 살기'. 지금이 기회였다.


언제까지 피부염을 가지고 회사에서 버텨야 하는 막연함이 아니라 나에게 어떤 일도 펼쳐질 수 있다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막연함이 나를 설레게 했다. 퇴사 날이 가까워질수록 피부염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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