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 보른은 바르셀로나 항구와 인접한 덕분에 중세 시대에는 바르셀로나 경제의 중심지였고, 대상인들의 저택이 즐비한 동네였다. 골목골목을 거닐며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사진 속 거리에는 엘 보른의 부자들이 즐겨 이용했다는 '릴리 호텔'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호텔에서는 귀부인들이 즐겨 찾는 특별한 서비스가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모유 수유를 대신해주는 간호사들을 위한 구역이 있었던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직접 모유수유를 하는 것을 나쁘게 여겼다는 것 같다. 물론 아이에게 대신 수유하는 간호사들을 고르는 데 있어서는 엄격한 조건을 적용했다고 한다. 젊은 여성이어야 했고, 크고 살집이 많은 몸집이 선호되었다. 깨끗한 피를 위해 이름과 가문을 따지기도 했단다.
돈으로 뭐든 사려는 모습들, 뒤틀린 모성애, 그들만의 폐쇄적인 모임에서 오고 갔을 정보, 서로 간의 과시와 은근한 경쟁들.. 몇 백 년 전 이야기라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익숙한 드라마다.
엘 보른과 고딕 지구를 걸어 다니면서 여성의 얼굴이 새겨진 건물을 무심코 지나친 적이 있을지 모른다. 이 가라싸스(carassas)는 바라보고 있는 건물은 매춘부 여성이 살고 있는 건물이라는 표식이라고 한다.
중세시대 바르셀로나는 매우 종교적인 도시였고, 교회는 매춘 사업과 매춘을 근절하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매춘부 여성들에게 다른 수입을 보장하려는 방법들이 고안되었지만, 이 오래된 비즈니스는 쉽게 뿌리 뽑히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교회는 방향을 틀어 매춘부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자처했다고 하는데, 공휴일 특히 크리스마스에는 이들이 일하지 않도록 교회에 모아 두고 일당을 지불하기까지 했다니. 칭찬을 해야 할지 비난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엘 보른 거리의 끝에는 엘 보른 기억문화센터 El Born CCM가 자리 잡고 있다. 원래 이곳은 엘 보른 시장이 있던 자리인데, 1971년 시장을 현대화하기 위한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지하에 묻혀있던 중세시대 거주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견된 거주지는 18세기 왕위 계승 전쟁 패배 후 강제 이주되었던 사람들의 터전이라고 한다. 바르셀로나 당국은 발굴된 거주지의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해 엘보른 시장 철거를 결정하고 현재의 모습인 기억문화센터를 설립했다.
역사의 보존, 그리고 중앙정권의 침략과 폭력에 대한 기억의 의미가 동시에 담긴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