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외국인의 순두부

by 힉엣눙크

오랜만에 단비가 내렸다. 따스한 햇살과 달콤한 바람, 온 세상 피어난 봄꽃들, 높은 가지에서 울려 퍼지는 새들의 노랫소리. 실내에만 머무는 것은 자연이 벌이는 진귀한 축제를 놓치는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몽유병자가 밤길을 헤매듯 나는 정처 없이 들판을 마냥 걸었다. 수로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노라니 축사가 나타났다. 살이 오른 소들이 쇠창살 너머에 누워서 지나가는 나그네를 무심히 쳐다보았다. 내가 구경을 하는 것인지 소가 구경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 구경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바닥은 온통 소똥과 오줌 그리고 왕겨가 진흙처럼 뒤섞여 있었다. 사람 많은 잔칫집을 기웃거리는 위정자들처럼 쇠파리, 똥파리, 날파리가 꼬여 들고 있었다. 꼬리로 파리들을 쫓으며 질척한 똥더미에 누워 질겅질겅 되새김질하는 소들의 맑고 큰 눈동자가 마치 고아원에 내맡겨진 아이들의 해맑은 눈동자를 바라볼 때 마냥 내 맘을 흔들었다.


다리가 아플 만큼 한참을 걷고 나니 어느새 마금산 온천지구에 도착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예전에 들른 적이 있었던 순두부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단체손님이 홀을 장악하고 있었다. 다행히 빈자리는 딱 하나 남아 있었다. 주문을 하자 반찬이 먼저 나왔다. 서빙을 하는 사람은 동남아 출신 여성이었다. 노인들로 이뤄진 단체 손님들 중 누군가가 그녀에게 물었다. “주인이 바뀌었나?” 그러자 그 외국 여성이 특유의 억양으로 말했다. “주인 있어요. 안 바뀌었어. 나는 며느리.” 귀가 어두운 노인이 되물었다. “엉? 마누라?” 그녀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쳤다. “아니. 마누라 아니라 며느리. 이 집 며느리!” 노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단체손님들 때문인지 음식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식당 안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벽에 걸린 현수막에 눈길이 머물렀다. ‘대한민국 국적증서 수여식장’이라는 글자를 배경으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자신이 ‘며느리’라고 크게 외쳤던 그 여성이 사진 속에서 꽃다발을 안고 가족들과 함께 활짝 웃음 짓고 있었다. 시집오려는 여성이 없어 속 태우던 아들에게 찾아와 준 외국 며느리,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손자를 둘씩이나 안겨준 며느리, 가업인 순두부 식당에 든든한 기둥이 되어준 며느리, 그런 며느리에 대한 시아버지의 사랑과 고마움, 그리고 자부심이 그 사진 속에 배어 있었다.


2020년 12월 혹독한 한파가 몰아치던 날, 삼십 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경기도 어느 농장 비닐하우스 가건물에서 잠을 자다가 얼어 죽었다. 가난한 가족들을 부양하고자 캄보디아에서 건너온 여성이었다. 채소를 수확하는 일을 하던 그녀가 난방이 부실한 숙소에서 기거하다 맞은 세 번째 겨울이었다. 이 사건은 외국인 노동자 처우에 관하여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우리 안에 내재된 천박한 자본주의에 경악했고, 꽃다운 나이에 숨진 여성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아팠다.


저임금과 임금체불, 폭력, 열악한 기숙사 시설, 산업재해. 언론에 종종 등장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관련 보도들이다. 우리나라의 하루 일당이면 자국의 한 달 임금에 해당하기에 가난한 그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는 일은 당연한 일일 터.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업종에서 일하려는 자국 사람을 구할 수 없기에 고용허가제라는 제도로 외국인들을 데려올 수밖에 없는 한국의 실정이 그들에게는 꿈을 이룰 기회가 되고 있다. 하지만 도착해서 경험하는 한국의 현실은 상상과는 달랐다. 축사 같은 환경에 자신들을 밀어 넣고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악덕 고용주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가슴에는 원망과 상처가 깊이 새겨졌을 것이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가 필리핀, 인도네시아보다 더 못살던 시절, 일자리마저 매우 귀했다. 반면 독일에서는 광부와 간호사가 위험하고 힘든 직종으로 인식되어 사람을 구하기 힘들었다. 한국과 독일 양국은 협정을 맺고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약 2만여 명에 가까운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를 독일로 송출했다. 그들이 가족들에게 송금한 돈은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친절하고 근면한 노동은 독일 경제와 사회에도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세월이 지난 후 독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일이 고되기는 했지만, 임금, 근로조건, 복지 혜택 등에서는 독일인들과 차별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엄마 찾아 삼만리'가 생각난다. 19세기말, 이탈리아 제노바의 가난한 가정, 13세 소년 마르코를 남겨두고 엄마는 가정부 일을 찾아 당시 신흥 부국으로 떠오르던 아르헨티나로 떠난다. 유일한 연락 수단인 편지가 끊기고 엄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르코는 혼자 길을 떠난다. 대서양 건너 멀고도 먼 타향, 닿을 듯 멀어지는 엄마의 흔적, 갖은 고난과 역경을 견뎌야 했다. 거지꼴을 한 채 드디어 만나게 된 엄마.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매던 그리운 엄마는 하지만 병석에 누워서 삶의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르코를 만난 엄마는 건강을 회복하게 되고 둘은 함께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간다. 훌쩍이며 책장을 넘기던 나의 어린 모습이 떠오른다.


태어날 때 우리는 모두 그냥 인간이다. 이 땅에 온 이방인이자 지구에 도착한 순례자일 뿐이다. 출생신고를 하면서 내국인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는 이제 러시아의 땅이 되었다. 우크라이나에게 크림반도에 살던 자국민들은 외국인이 되었고, 러시아에게 크림반도의 외국인들은 자국민이 되었다. 국경은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주인을 교체한다. 하지만 그 땅 위에는 러시아인도 우크라이나인도 한국인도 미국인도 없다. 다만 욕심과 집착과 망상과 착각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뒤늦게 나온 순두부는 맛이 있었다. 한참을 먹고 있을 때 누군가 두부 무침이 담긴 작은 접시를 테이블 위에 슬쩍 올려놓았다. 고개를 드니 가게 주인의 '며느리'였다. “많이 기다려서... 미안.” 서툰 그 한마디를 남기고 바삐 사라졌다. 단체 손님들 때문에 오래 기다려야만 했던 내가 마음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두부 무침이 먹고 싶었지만 혼자 먹기에 양이 많아 주문을 참았던 터였다. 그녀가 건넨 두부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자 고소함이 입안에 가득 찼다. 한적한 구석에 위치한 이곳이 왜 사람들이 찾아드는 맛집이 되었는지 알았다. 순박한 정, 사람의 향기가 콩물을 응고시키는 간수처럼 순두부의 맛을 더욱 깊고 고소하게 만들기 때문이리라.


독일로 사우디로 미국으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야 했던 우리 윗세대의 고난이 이탈리아의 마르코 엄마, 캄보디아의 여성과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 노동자들이 설움과 눈물로 고통의 날들을 보내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출국장에서 상처와 원망이 아니라 감사와 보람을 가슴에 가득 안고 돌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아카시 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오니 아버지 기일도 머지않았다. 제사상에 외국인, 아니, 우리 이웃이 건네준 두부도 조금 올려볼까 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꽃을 선물하고 욕을 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