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다음 날 겨우내 앙상하던 산들이 연초록 새싹들로 풍성해졌다. 봄비에 촉촉해진 산세가 마치 지구의 밥상 위에 올려진 상추 마냥 먹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먼지가 말끔히 씻긴 대기 너머 평소 잘 보이지 않던 먼 산들이 마치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다가왔다. 특히 봄철에는 이런 날이 드물게 찾아오기에 티 없이 푸른 하늘과 선명한 시야를 접하는 날이면 반가운 손님을 맞는 듯 설렌다.
안개와 미세먼지가 많은 날은 부옇게 흐려서 창밖으로 보이는 지평선은 갑갑하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막막하고 모호한 세상. 무지하고 막연한 대상은 우리의 욕망이나 의지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흐리고 혼탁하며 확실하지 않은 상황은 실천을 견인할 동인을 꺼뜨리고 제자리에 주저앉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맑게 갠 아침, 또렷하게 다가오는 산처럼 명징한 대상은 우리의 감각을 일깨우고 그곳으로 향하게 한다. 눌려진 스프링, 당겨진 시위, 희망으로 두근대는 심장처럼, 모든 준비된 것들은 때를 만나면 활짝 피어난다. 마술사의 입김처럼 ‘훅’
2009년 함안 성산산성 발굴조사현장에서 연꽃 씨앗 4개가 발견되었다. 탄소 연대측정 결과 700여 년 전 고려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놀랍게도 그중 3개가 싹을 틔웠다고 한다.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참고 기다려 온 연꽃의 씨앗이 인간의 손끝에 닿아 활짝 꽃을 피우는 기적 같은 때를 만난 것이다.
반항아, 고집불통, 통제불능, 부모도 제어할 수 없는 문제아였다. 어릴 때 뇌염으로 시각장애, 청각장애, 언어장애의 삼중고를 떠안게 된 6살의 헬렌 켈러에게 앤 설리번 선생이 찾아왔다. 앙숙인양 벌이는 전쟁, 거칠고 위험한 야생마 길들이기가 시작되었다. 싸움이 여름 장마처럼 지루하게 이어지던 어느 날, 헬렌 켈러가 펌프에서 쏟아지는 물을 느꼈을 때 설리번 선생이 손바닥에 가만히 써 준 글자 '물(water)'. 그 순간 겨울 들판처럼 황량하던 그녀의 가슴에 단비가 내리고 싹이 돋아났다. 소녀는 증오와 분노의 빗장을 가만히 풀고서 훈풍이 부는 들판으로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걸어 나왔다. 단단하고 어두운 씨앗 껍질 속에 갇혀있던 그녀에게 때가 온 것이었다.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서는 햇빛, 수분, 온도가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지만 몇 년을 땅속에 있어야 하는 것, 불에 타야 하는 것, 동물의 몸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 것, 겨울을 지내야 하는 것, 햇빛을 쫴야 하는 것, 어두워야 하는 것 등 씨앗마다 제각각 다양한 조건이 필요하다. 이처럼 자연의 변화, 생명의 탄생은 여러 조건과 인연 그리고 때가 서로 맞아야 이루어진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는 안에서, 어미 닭은 밖에서, 서로 쪼아야 알에서 깨어난다는 뜻이다. 지상의 모든 생명들이 몇 개의 요소만으로 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무지이고 오만이다.
지난가을, 아내는 정원에서 열심히 씨앗을 받아 봉투에 소중히 담아 보관했다. 봄이 되자 포트묘를 만들어서 씨앗을 뿌렸고 정성을 들여 물을 주고 관리했다. 아쉽게도 발아율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유난히 잘 된 씨앗이 있었다. 떡잎이 씩씩하게 솟아나서 포트를 가득 메웠다. 아내는 장모님과 처형, 이웃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내가 이쁜 꽃들만 엄선해서 받은 씨앗인데 그중에 성공적으로 발아한 것들이에요. 나중에 깜짝 놀라실 거예요.”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이웃 아주머니가 물었다. “이거 상추랑 너무 비슷한데?” 장모님이 말씀하셨다. “니 와 상추를 줬노?” 처형이 외쳤다. “야. 이 사기꾼아!” 사태를 파악한 아내는 무안한 마음에 웃으며 말했다.
“상추꽃이 얼마나 예쁜데!”
움츠렸던 세포들이 숨을 크게 쉬고, 묶여 있던 사슬은 끊기고, 어두운 골짜기에 햇살이 비치면 씨앗은 발아한다. 어쩌면 우리 각자는 생명의 기원 이후 38억 년이라는 영겁의 세월을 기다려 피어난 존재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놀라운 서사가 왜 감동과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인가? 왜 축복보다는 저주가, 환희보다는 절망이 감사보다는 원망의 시간이 생을 살아가면서 더 많은 것일까?
삶은 아름답지만 추하고, 따뜻하지만 냉혹하며, 꿈처럼 달콤하거나 불꽃처럼 빛나는 건 순간일 뿐, 성취보다 실패가 더 많기 때문이리라.
빛나는 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똥벌레였다는 황가람의 노래 가사처럼 나도 내가 아름다운 꽃 장미인 줄 알았고 의심한 적 없었다. 몰랐다, 살다 보니 내가 상추라는 것을. 상추면 또 어떤가.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사는 싱그럽고 맛있는 존재가 아닌가. 하지만 내가 그렇게 살아왔을까 생각하면 부끄러워진다. 주기보다는 받으려 했고, 화려한 꽃인 줄 착각하면서 그렇게 되려고 아등바등거리며 다퉈온 삶이 어지러이 돌아보이기 때문이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혀진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날에 삶이 괴롭고 슬프게 느껴질 때면 가만히 헬렌 켈러의 말을 곱씹어 본다. 먼 곳에 눈을 두고 헤매는 나의 이 속절없는 어리석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