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을 치려면 힘이 좋아야 되죠?”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취미로 드럼을 배우는 다른 동료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그렇지는 않아. 힘껏 세게 쳐보니까 소리가 좋지 않더라고. 오히려 힘을 빼야 해. 섬세하고 유연한 기술이 필요한 게 드럼이란 걸 알아가고 있어.” 평소 운동을 좋아해서 탄탄한 몸집을 자랑하는 그가 내뱉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박력과 힘 그리고 불꽃같은 열정, 박자를 지키고 리듬을 놓치지 않으려는 얼음 같은 침착함. 드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심장을 진동시키고 잠자는 영혼을 벌떡 일으켜 세우는 요란한 격정의 타악기 드럼에 오히려 섬세하고 부드러운 기술이 필요하다니 신선했다. 미친 듯이 한계와 경계를 향해 치달아야 하는 것이 드럼의 연주법인줄 알았는데 그 속에 지나침을 경계하는 공자의 중용이 숨어있을 줄이야.
대화를 한다는 것, 관계를 맺는 일은 일종의 연주다. 2중주에서 대규모 협주곡까지 참여자의 숫자나 방식은 다양하다. 연주자의 성향도 각양각색이다. 강한 인상을 지녔지만 마치 북의 가장자리를 슬금슬금 두드리며 변죽만 울리듯 에둘러서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유약하고 부드럽게 보이는데 북의 중앙을 힘차게 내리치듯 단호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에두르기보다 솔직하게, 모호하기보다는 직접적일 때가 서로를 이해하는데 나을 때도 있다. 표현은 부드럽게, 내용은 명확한 경우가 관계에서 더 효과적일 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반대로 한다 표현은 거칠고 내용은 모호하게. 손해를 입히거나 이익을 챙기려는 의도를 숨길 때 그런 행태가 잘 드러난다. 그러면 싸우기 딱 좋다.
영국 런던 대학의 세미르 제키(Zeki) 교수 연구팀의 논문에 따르면, 사랑과 증오라는 상반된 감정은 우리 두뇌의 같은 부위에서 유발된다고 한다. 어쩌면 사랑과 증오는 N극과 S극으로 한 몸을 이룬 자석처럼 집착이라는 몸뚱이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가까이하려 하거나 멀리 하려는 강력한 본능.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붙어 있는 한 몸. 제키 교수의 연구에서 흥미로운 점은 사랑과 증오가 공통적으로 고통이 발현되더라는 것이다.
내가 아는 지인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같은 직장에서 만났다. 언제부턴가 그는 그녀에게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것에도 화를 내고 시비를 걸었다. 과도한 일을 요구하거나 수시로 번복하기도 했다. 작은 실수, 하찮은 일에도 딴죽을 걸었다. 그녀의 증오와 분노가 점점 증폭되고 인내가 한계에 다다를 즈음 그의 사소한 도발은 불을 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그를 따로 불러냈다. 분노와 원망으로 눈물을 흘리며 따졌다 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냐고. 가만히 듣고 있던 그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을 보고 첫눈에 반했어.”
감정을 격하게 토해내며 눈물을 훔치던 그녀는 순간 멍하니 침묵을 지켰다. 잠시 뒤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왜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못살게 굴었어?”
“두근대는 내 감정을 나도 잘 몰랐고 어떻게 표현하고 무엇을 전해야 할지 캄캄했어. 늘 당신 생각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렸고 불면의 괴로움을 안겨주는 당신이 미웠어.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런 내 마음을 들킬까 봐 두려웠어.”
그녀는 쿵하는 충격에 온몸이 흔들렸고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에 무너졌다. 증오의 감정이 핑그르르 돌더니 사랑으로 변했고 동전은 바닥에 쓰러졌다. 둘은 서로의 마음을 열게 되었고 변죽만 울리던 그의 사랑은 결국 결혼으로 이어졌다.
살아가는 일이란 인생을 드럼으로 연주해 내는 일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리듬을 타야 하고 박자를 지키고 다른 연주자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 너무 과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때로는 섬세하고 유연하게. 중용을 지키며 온몸으로 즐기는 일.
나의 인생 연주는 잔뜩 힘이 들어간 채 열심히 두들기기만 한 것은 아닌지, 혹은 변죽만 울리면서 머뭇거리지는 않았는지 가만히 돌이켜본다. 비워내는 여유보다 탐욕과 아집으로 속이 꽉 들어차서 두드림에 무감각하고 울림이 없는 건조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가 자문해 본다.
중년을 지나 이제 원숙한 연주자의 반열에 올랐어야 함에도 나는 여전히 어리석기에 나이트클럽에서 술꾼들의 흥이나 돋우는 삼류 드러머다. 취향에 맞지 않는 노래도 연주하고 다른 연주자와 갈등에 빠지고, 주정꾼들의 도발에 발끈하면서 채를 던지기도 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이 다시 의자로 돌아와 박자를 맞출 뿐이다. 몸의 힘을 빼고 리듬을 타면서 유연하고 부드럽게 나만의 연주를 할 수 있는 멋들어진 그날을 꿈꾸면서 말이다.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오욕과 모멸 그리고 관계의 상처를 견뎌내는 일이다. 지하공간이든 펜트하우스든 연주홀이든 스타디움이든 어디에 있든 무슨 곡을 치든 간에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드러머(drummer)이자 드리머(dreamer)고 주인공이자 왕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던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의 대사처럼 우리는 모두 각자의 숙명, 운명의 왕관, 그 무게를 이겨내고 극복해야 한다. 달리 도리가 없다.
지금 어둠 속을 헤맬지라도 스틱을 두드리고 킥 드럼을 힘차게 차면서 나만의 곡을 연주하자. 웃어라 그대.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