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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성의 경계에서

by 힉엣눙크

아침에 늦잠을 자버렸다. 서둘러 씻은 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식탁에 앉았다. 아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마치 바둑 해설자처럼 차분하게 말했다.


“셔츠 단추를 하나만 풀면 지성, 두 개를 풀면 야성, 세 개 이상을 풀어헤치면 실성.”


나는 고개를 숙여 셔츠를 살폈다. 서두르다 보니 단추를 미처 잠그지 않은 채였다. 샐러드를 아삭거리며 나는 말했다.


“그럼 나는 실성을 한 거네.”


‘실성’이란, 온전하고 정상적인 마음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환각이나 망상에 빠져 비현실적인 상태에 이른 것을 말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실성한 것이 맞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감 중 시각의 작용을 예로 들자면, 대상에 반사된 빛이 눈에 들어오면 시신경이 이를 전기신호로 바꾸고, 뇌가 그것을 영상으로 해석한다. 이처럼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감각기관을 통해 입력된 정보를 두뇌가 조합해 꾸며낸 결과물이다.


즉, 세상의 진정한 실체란 알 수 없는 것이고, 오직 인간의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것이 사실 꿈일 수도 있고, 내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어쩌면 거대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은 멀쩡하다고 확신하는 사람, 자신이 보는 세상이 진짜라고 굳게 믿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환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미친 사람일수록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을 객관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 실성했다는 사실을 알려줘서 고마워.” 내가 집을 나서며 중얼거리자, 아내가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왕 착각할 거면 비관보다는 행복이 낫지 않겠어? 오늘도 즐겁게 지내셔.”


AI를 사용하다 보면 종종 그럴듯한 거짓말을 사실인 양 전달하는 경우를 접한다. AI가 부정확한 데이터로 학습되거나 문맥을 잘못 이해할 때 생기는 현상이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 즉 ‘환각’이라고 부른다. 할루시네이션이란 환시나 환청처럼, 없는 사실을 마치 있는 것처럼 지각하는 현상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을, 왜 AI는 그럴듯한 거짓을 만들어내는가?


어느 전문가는 “검색엔진에 상상력을 부여해 만든 것이 AI”라고 말했다. AI는 정답만을 찾아내는 기계가 아니라, 패턴을 조합해 ‘있을 법한’ 대답을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오픈AI와 테슬라 등에서 핵심 연구를 진행했던 어느 컴퓨터 과학자가 말했다 한다. “AI의 환각은 버그가 아니라 특징이다.” 인간에게 상상과 착각과 망상이 상수이듯, AI에게도 환각은 태생적인 한계일지 모른다.


이틀 전,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다녀왔다. 자동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동생이 말했다.

“예취기를 오랜만에 다루다 보니 손에 물집이 잡혔어. 그러고 보면 인간의 몸은 참 연약해. 그치?


그러자 뒷자리에 앉아 있던 제수씨가 대꾸했다. “그러니까 보호장구를 착용하는 거잖아. 사람도 딱딱한 껍질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동생이 말했다. “고생대 삼엽충은 단단한 외피로 자신을 보호하며 살았지만, 이억 오천만 년 전에 멸종하고 말았어. 껍질이 있다고 안전해지는 것도 아니야.”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생각했다. 삼엽충은 단단한 껍질을 너무 믿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확신이 결국 멸종을 불러온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연약한 피부를 지닌 덕에 항상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래서 상상하고, 만들고, 응용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무르고 부드러운 문어가 단단하고 날카로운 갑각류를 잡아먹듯 말이다. 단단하다는 확신, 안전하다는 믿음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연약한 피부와 상상의 힘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였다.


늦잠을 잔 그날 사무실에 도착하자, 공교롭게 노숙자가 찾아들었다. 그의 방문 목적은 물질적인 무언가를 얻기 위함이었다. 초점을 상실한 눈동자, 흐트러진 옷, 술과 땀이 뒤섞인 고약한 냄새가 사무실을 뒤덮었다. 그가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는 완전히 열려 있었다. 아침 식탁에서 나의 셔츠처럼, 이미 아노미(anomie)의 단계에 이르렀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맥락 없는 말, 횡설수설하는 언어. 그의 두뇌는 정상적인 통제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말 그대로 ‘실성’이었다. 여직원의 노련한 대처로 그는 사무실을 떠났고, 평화가 돌아왔다.


퇴근길. 주차장으로 향하던 나는, 길바닥에 누워 자고 있는 그를 다시 보았다. 가슴을 풀어헤친 채, 아무런 깔개도 없이 콘크리트 맨바닥 위에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에게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고, 그는 한없이 무기력했을 것이다. 그래서 알코올에 의존해 피안의 세계로 도피하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모든 보호막을 벗어버리고 떠도는 ‘노마드(nomad)’였다. 중독된 환각 속에서 살아가는 자유로운 수인(囚人). 민달팽이처럼 연약해 보였지만, 어쩌면 그는 삼엽충처럼 단단하고 경직된 자신의 환각 속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신경과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독일의 '필리프 슈테르처'는 그의 저서 『제정신이라는 착각』에서 말한다.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분할 명확한 선은 없으며, 일상적 사고와 망상의 경계도 모호하다고 말이다. 인간은 모두 어느 정도의 비정상을 품고 살아간다고.


즉, 인간은 정신병리학적 스펙트럼 위에서 각자의 중증도와 빈도에 따라 다양한 ‘할루시네이션’을 경험하고 있는 셈이다. 감정, 직관, 상상. 이것은 인간만의 특징이자 장점이며, 인류 문명을 도약시킨 촉매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환각이다.


사랑에 빠지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이별하면 세상이 나에게 슬픈 노래만 들려주는 듯하며, 증오에 휩싸이면 모든 걸 때려 부수고 싶어진다. 상황과 감정에 매몰되면 그와 유사한 것들만 눈에 보이는 현상. 바로 감정적 인지편향이다. 최근 AI 알고리즘과 함께 주목받는 ‘확증편향’도 인지편향의 일종이다. 자신의 신념과 편견을 강화하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는 심리. 내가 옳고 남이 틀렸다는 맹신. 사실관계를 살피고 분석하기보다는 개념화하고, 뭉개고, 왜곡해 버리는 태도. 진실은 그렇게 모호해진다.


기후위기와 AI는 인류에게 위기이자 기회다. 지혜를 모아 대응하기에도 벅찬 과제인데, 사람들은 오히려 갈라지고 싸우고 분열하고 있다. 19세기처럼, 세계는 다시 무질서한 약육강식의 시대를 향해 나아간다. 사실 관계를 왜곡하고 음모론을 앞세우며 약자들을 선동하는 세상.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 전쟁과 홀로코스트.

명분이나마 유지하던 정의와 공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굴복을 강요하고 약탈을 서슴지 않는 힘의 윤리만이 난무한다. 지금, 전 세계는 ‘실성’의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사랑과 증오, 돈과 관계, 생존과 번식. 그 속에 있을 땐 영원할 것 같지만, 결국은 계절과 바람, 파도와 구름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고생대 삼엽충처럼 말이다. 하지만 오늘도 현실만이 진실이라 믿으며 바쁘게 살아가는 나는 셔츠 단추를 세 개 이상 열어놓은 채 ‘할루시네이션’의 경계 속을 머물 뿐이다. 어쩌면 당신도 셔츠 단추를 여럿 풀어놓고 꿈속을 헤매고 있는지 모른다. 한번 고개 숙여 바라보시라.


“Miserere mei, Deus. - 신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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