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 후 커피를 한 잔 들고 밖으로 나섰다. 현관 앞 처마밑에 앉아 정원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홀연히 나타난 새. 몸통과 날개에는 검은색 줄무늬가 있었다. 갈색의 머리 위에는 부채처럼 접었다 폈다 하는 깃털. 펜싱선수의 검처럼 가늘고 긴 부리. 이국적인 그 새가 초록의 잔디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새와 나의 거리는 불과 6미터. 위험하다 여겨지지 않는지, 아니면 겁이 없는 것인지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생소한 그 새를 처음 알게 해 준 사람은 캐나다인 영어강사였다. 푸른 눈의 그녀는 새를 좋아했다. 주말이면 남편과 주남저수지나 낙동강을 찾아 탐조활동을 한다고 했다. 수업시간에 자신이 직접 찍은 철새들의 사진을 파워포인트 화면에 띄우고 이름을 알려주곤 했다. 수업을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고 항상 10분 일찍 와서 준비했으며 정해진 시간을 넘겨야 끝마쳤다. 학생들이 휴대폰을 보는 등 딴짓을 하거나, 전화 통화를 위해 밖으로 나가거나, 자주 들락거리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직장 내 장기 연수과정으로 수업을 듣던 늙은 학생들은 그런 그녀가 ‘유도리’가 없다며 불평을 했고 좀 융통성 있게 수업을 진행해 줄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영화 ‘굿바이 미스터 칩스’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원칙을 고수했지만 열정을 다해서 수업에 임했기에 우리들은 불만이 있어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가 영상 하나를 띄웠다. 벽돌로 된 건물의 틈새에 둥지를 튼 새의 모습이었다. 캠퍼스를 지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며 아이처럼 맑은 눈을 반짝였다. 새의 이름은 ‘후포’라고 했다.
영어로 ‘후포’, 우리나라에서는 ‘후투티’라고 부른다. 다른 새와 확연히 구분되는 외모. 선명한 줄무늬와 머리깃 그리고 긴 부리 때문일까. 사람들은 그 새를 쉽게 기억하고 잘 잊지 못한다. 우리 집 잔디밭 가장자리는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벽돌이 깔려 있다. 잔디가 바깥으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하늘에서 보면 마치 심장이나 하트 모양 비슷하게 보일 것이다. 긴 부리로 후투티는 빠르게 잔디밭을 찌르기 시작했다. 가볍고 빠른 동작이 마치 드르륵거리는 해머 드릴처럼, 나무를 두드리는 딱따구리 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갯벌에 난 작은 숨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세발낙지를 잡는 사람처럼 땅바닥을 빠르게 여기저기를 찔러댔다. 그러다 부리 끝에 벌레가 걸리면 땅 위로 집어 올려서 쪼고 흔든 후 삼켰다. 한동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의자에 붙박여 일어설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녀석이 훌쩍 도망가버릴까 봐서였다. 멀리서부터 잔디밭을 지그재그로 훑어가며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콕콕콕’ 거리는 부리질이 리드미컬하게 계속되었다. 벌레는 10번 정도 찔러서 잡을 때도 있었고 70번을 넘게 노력해야 될 때도 있었다. 후투티의 삶은 참 집요하고 끈질겼다. 스스로 사냥할 수 없다면 생존할 수 없는 운명. 지독한 자유와 절대 고독. 새 한 마리를 그처럼 오래 쳐다본 적은 내 생에 처음이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녀석을 관찰하며 앉아 있으려니 다소 고통스러웠지만 신기하고 매력적이었기에 움직일 수 없었다. 녀석은 한 번씩 빤히 나를 쳐다보더니 점점 다가왔다. 내가 두렵지 않은 듯했다. 이윽고 2미터 가까이 접근했다. 그때였다. 머리에 댕기같이 생긴 깃을 모히칸 족의 머리장식처럼 활짝 펼쳤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끝부분을 검은색으로 물들인 부채를 펼친 듯했다. 그러고는 기지개를 켜듯 날개도 반원형으로 쭉 펼치는 것이 아닌가. 마치 교태를 부리는 것인지, 위협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랑을 고백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몸짓을 했다. 자연의 창조물은 그저 아름다웠다. 바싹 다가온 후투티는 이제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새카만 눈동자, 부리 사이의 가느다란 혀, 골격의 미묘한 굴곡과 깃털의 섬세한 색감이 또렷하게 보였다. 기이한 흥분이 일었다. 그 새가 날아와 내 가슴을 콕콕 찌를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치 큐피드의 화살처럼.
미국의 철학자이자 인지과학자 대니얼 데닛은 그의 저서 <마음의 진화>에서 사람의 감각과 감정을 자물쇠에 비유했다. 외부의 자극이 그곳에 꼭 맞는 열쇠라면 감각의 자물쇠를 열게 되는데 그때 인간은 달콤하고 쓰고 짜릿하고 뜨거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초음파는 인간이 들을 수 없기에 우리에게 열쇠가 될 순 없지만 개, 고양이, 박쥐나 돌고래에게는 들어맞는다. 세상은 이처럼 다양한 열쇠와 자물쇠가 벌이는 향연이다. 인식이라는 극장의 흰 스크린에 빛이 내린다. 과거와 미래, 현미경 속 세상에서 광막한 우주까지 끝 모를 드라마에 울고 웃는다. 기적과 같고 운명처럼 여겨지는 것.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은 기막히고 서럽고 아찔하고 외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몸을 휘감는 바람, 코끝을 스치는 금목서의 향, 가슴이 탁 트이는 아름다운 절경. 세상의 모든 황홀하고 달콤한 아름다움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그것은 곧 열쇠가 나의 자물쇠에 닿았다는 것이고 누군가 ‘딩동’하고 벨을 눌렀다는 뜻이다.
”왜 그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 창문 너머에서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속삭였다. ”내 앞을 봐. 후투티야."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우와, 바로 옆에까지 왔잖아? 당신이 허수아비로 보이는 모양이지?"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재도 바보는 아니거든. 간간이 내 동태를 살펴. 근데, 안 움직이려니까 나무 의자가 너무 배기네." 후투티는 인간의 대화에 잠시 귀를 기울이더니 곧 제 할 일을 계속했다. 셋 모두는 각자의 의미로 서로에게 열쇠와 자물쇠가 되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우연히 찾아든 후투티에게 심장을 내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비둘기도 직박구리도 까치도 그저 무심히 스치듯 지나가지만 우연히 나타난 후투티에게 잔디밭은 열쇠였고 잔디밭에게 후투티 또한 열쇠가 되었다. 서로의 문을 열지만 각자의 세상을 향할 뿐이다. 둘이 함께 같은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은 오해와 착각이다. 잔디밭에 내려앉은 후투티는 가느다란 구멍을 수없이 만든다. 그때 심장은 뜨겁게 뛰고 상처는 오래 쓰리다.
어디선가 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흔들리는 가지와 잎사귀들. 스치고 흩날리는 소리들이 찬란하게 부서지자 후투티는 왔던 방식 그대로 홀연히 잔디밭을 떠났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등받이에 눌린 피부가 움푹 파여 자국이 남았다. 심장도 여전히 뛰고 있었다. 어느새 선선해진 바람이 가슴에 난 조그마한 구멍들을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