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고 싶은 어머니 잘 계시나요? 이렇게 편지를 쓰려니 목이 멥니다. 제 편지가 정보기관의 감시망에 걸려 발각이 되지는 않을지, 혹여 어머니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으로 참고 또 참아온 세월이 벌써 30년이 훌쩍 넘어버렸네요.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어머니, 그 멀고 먼 나라에 잘 계시나요?
수배자 명단에 오른 후 숨어 지내던 날들이 어제처럼 떠오릅니다. 최루가스를 마시며 독재타도를 외치던 학우들,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숨겨주던 친구들, 새로운 날을 맞이하려고 싸우던 순수했던 시절, 그 눈물겨운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러가 버렸군요. 친구의 사촌형 집에 머물던 무렵, 배신자의 밀고로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들을 피해서 도망치다가 마지막 수단으로 밀항을 택했었죠. 어느 세상, 어느 나라에 도착할지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상황에서 저는 유일한 대안, 그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죠. 저에겐 운명이었습니다. 어머니, 작별인사도 없이 불쑥 떠나버린 불효자를 부디 용서해 주세요. 사랑한다는 말, 따뜻하게 한 번 안아드리지도 못한 채 떠나온 것이 두고두고 가슴에 한으로 남았습니다.
깊은 밤중이었어요. 밀항선이 연안에 도착하자 조그만 고무보트로 갈아타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 되었으니까요. 해안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보트를 운전하던 브로커가 옷을 다 벗으라 말했어요. 이상한 옷을 입고 있으면 사람들에게 의심을 산다는 거였어요. 겨울 찬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죠. 내가 알몸이 되자 그가 시퍼런 바닷물에 나를 밀어 넣었어요. 풍덩하고 빠져버린 차가운 바닷물 속. 그 시커먼 두려움의 심연에서 오직 살아남으려는 본능만이 나를 정신없이 허우적거리게 만들었습니다. 오래 헤엄치면서 짠 바닷물을 많이도 마신 후. 기지맥진해서 간신히 모래사장에 발이 닿았습니다. 아,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온몸에 전율처럼 몰려왔어요. 곧 모래사장에 쓰러져 의식을 잃고 말았죠.
깨어보니 어떤 노인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어요. 새벽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던 늙은 어부가 해안가에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자신의 오두막에 눕혀놓은 거였어요. 노인은 깨어난 내 모습을 보더니 뭐라고 말을 했어요. 하지만 생소한 그 언어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죠. 이후 그는 나를 ‘대근’이라고 불러주었어요. 내가 알몸으로 해변에 누워 있을 때 내 몸에 달린 물건을 보고 놀랐던 거죠. 여기 사람들보다 세 배는 더 큰 나의 그것을 말이죠. 그는 말의 물건을 이식해 놓은 줄 알았다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이름을 대근이라 붙였다고 하더군요. 이후 그는 나를 선원으로 고용했어요. 말을 못 하는 외국인, 바닷가에서 죽어가던 난민을 살린 그는 나를 일꾼이자 노예로 부렸습니다. 자신의 옷을 주고 밥을 먹였어요. 하지만 그게 전부였어요. 돈은 전혀 주지 않았죠. 그와 생활하면서 이 나라의 언어를 익혔죠. 티브이와 라디오를 들으며 배우기도 했고요.
어느 날 저녁을 먹으면서 내가 떠나겠다고 말하니 노인이 들고 있던 숟가락을 벽에다 냅다 던졌어요. 육십이 넘은 노인이 힘은 장사였어요. 숟가락이 나무 합판으로 된 벽에 박히고 말았죠. 시뻘건 얼굴을 한 그는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외쳤어요. 살려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라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어요.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몽둥이를 가져와서 나를 사정없이 팼어요. 눈두덩이가 부어서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온몸 여기저기에서 피가 났어요. 사흘간 앓아누웠었는데 살아남은 게 신기할 정도였죠.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된 날, 노인의 싸늘한 경고를 들었어요. ‘살아서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고. 사실 그곳은 육지가 아니라 ‘의옥도’라고 불리는 섬이었어요. ‘의옥도’라는 이름은 개미지옥이라는 뜻이래요.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갈 수 없는 제일 멀고 외딴섬. 외부와 연결된 것은 오로지 노인이 소유한 배 한 척뿐이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뭍으로 나갈 때면 노인은 북쪽으로 배를 몰았어요. 육지는 북쪽에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알았죠. 이후 떠나겠다는 이야기, 보내달라는 하소연을 다시는 입 밖으로 꺼낼 엄두조차 하지 못했어요.
3년이 경과하고 난 어느 새벽, 노인이 술에 취해 깊이 잠들었을 때였죠. 몰래 안방으로 들어가 장롱 속에 숨겨둔 어선 키를 훔쳐서 살며시 나왔어요. 미닫이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안 돼’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아, 들켰구나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그는 다시 이불을 덮고 코를 골았어요. 잠꼬대를 했던 겁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어요. 마당에 나선 후 쏜살같이 바다를 향해 달렸죠. 부둣가에 다다라 말뚝에 묶인 밧줄을 풀고 덴마선에 올랐어요. 평소 노인이 하던 것을 기억해 내려 애썼습니다. 배터리 스위치를 올린 후 기도하는 마음으로 키를 넣고 돌렸죠. ‘쿠르르릉’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렸어요. 늘 지겹고 고단했던 소리가 그토록 가슴 설레고 반가울 줄은 정말 몰랐어요. 레버를 밀어서 배를 출발시켰어요. 타륜을 북쪽으로 돌렸을 때 고함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노인이 대문밖으로 달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어요.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더니 전화기를 꺼내 통화를 하더군요. 섬뜩했어요. 섬이 까마득하게 작아질 무렵 박명 속에서 희미하게 무언가가 보였습니다. 이윽고 빠른 속도로 바싹 따라붙는 것, 바로 모터보트였어요. 연락을 받은 인근 섬 주민이었죠. 사내가 배를 세우라고 고함을 쳤어요. 하지만 내가 속도를 늦추지 않자 배 옆으로 바싹 다가왔어요. 노랑머리에 찢어진 눈, 험상궂게 생긴 사내였어요.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는 광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습니다. 그가 무언가를 들어 올렸어요. 작살이었죠. 순간 몸을 낮췄을 때 머리 위로 휙 하고 화살이 지나갔어요. 앞 유리창이 박살이 나면서 유리 알갱이들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두 번째 작살을 장착하고 있을 때 나는 바닥에 놓여 있던 장대 갈고리를 집어서 그를 향해 던졌어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가 나가떨어졌습니다. 머리에 피가 솟고 있었죠. 모터보트는 방향을 잃고 뒤쳐졌어요. 다시 추격해 올까 싶어 연신 뒤를 돌아보며 배를 몰았어요. 덴바 엔진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크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때 저 멀리 육지가 보였습니다. 덴바야 조금만 더 힘을 내. 타륜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습니다. 결국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배는 멈추고 말았어요. 엔진룸에 연기가 나고 순식간에 불이 붙었어요. 화염과 연기를 피해 뱃머리로 갔어요. 아직 육지는 한참 멀었고 바다는 거칠게 출렁이고 있었죠. 바람소리 그리고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만 들려오고 있었어요. 그 상태에서는 바다로 빠져 죽는 일 밖에는 없었죠. 배는 조금씩 바다의 숨소리를 따라 어딘가로 이끌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선이 나타났어요. 손을 흔들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윽고 그 배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죠. 그들의 배로 옮겨 타자 나를 탈출시켰던 덴마는 서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육지에 상륙하자마자 사람들을 피해 최대한 멀리 떠났어요. 낯선 곳,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필사적으로 그들의 언어를 익혔죠. 생김새도, 행동과 문화도 전혀 다른 사람들 틈에서 적응하느라 죽을힘을 다했어요. 불법체류자의 고단한 삶이 오래 이어졌습니다. 농촌의 계절노동자, 공장의 일용직으로 전국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어요. 밀린 임금을 요구했을 때 나의 처지를 잘 아는 사장은 ‘고발을 하든 고소를 하든 네 마음대로 해봐!’라고 말했습니다. 고용주가 제공하는 임시 숙소에서 여름에는 찌는 듯 더웠고 겨울에는 이가 덜덜 떨릴 정도로 추위에 떨어야 했어요. 여기 이 나라는 잔혹합니다. 점수와 실력이라는 잣대로 분류하고 임금이나 처우에서 차별을 합니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말이죠. 나의 눈에는 우리나라의 계급제도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어요. 우리 계급제가 더 솔직한 것 같아요. 여기는 교묘하게 속이지요. 공정이라는 기준을 내세우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이어서 결국 부모 잘 만나고, 더 많이 가지고, 힘이 강한 사람들이 종내 이기는 게임말이죠. 위선이라 느껴져요. 가식이지요. 차라리 대놓고 차별하는 계급제 사회인 우리나라가 더 솔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네가 능력주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믿는 것 같아요.
제가 여기 멀고도 구석진 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고향 사람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정보기관조차도 말이죠. 지금껏 내가 살아 있는 이유겠지요. 망명자로서의 삶은 나에게 저주와 같아요. 그리운 고향에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죠. 내가 연락을 취하면 돌아갈 수 있겠지만 그땐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겠지요. 우리나라의 권력과 법은 잔인하고 엄하니까요. 몇 년 전에 그를 우연히 만났어요. 우리 고향 사람을요. 첫눈에 알아봤죠. 이곳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무언가를 우린 서로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는 범죄자였죠. 그곳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쳐 나온 것이었어요. 여기서의 생활도 녹록하지 않아서 그는 결국 고향에 대한 향수병을 이길 수 없었어요. 그만 가족에게 연락을 취하고 말았죠. 정보기관의 위치 추적망에 걸려 곧 그는 끌려갔어요. 저도 차라리 그때 같이 잡혀가서 고향의 하늘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럴 때마다 저를 붙들어 매 준 것은 그녀였어요.
어머니, 전 여기서 현지인 여성을 만나 같이 살게 되었어요. 이 나라 사람들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생기와 활력으로 반짝여요. 그녀를 만난 건 행운이었죠. 어머니도 그녀를 보신다면 예쁘고 대견하다 여기실 거예요. 어느 정도 이 나라에 적응을 하고 아내와도 잘 지내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겼어요. 몇 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거죠. 당연한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사실을 들었던 고용주가 어느 날 화장실 소변기에서 자신의 땅콩만 한 물건으로 일을 보다가 제게 넌지시 말했어요. ‘내 맑은 물 좀 빌려줄까? 아주 팔팔하고 싱싱해. 결과는 확실하지. 언제든 말만 해. 내가 도와줄게." 처음에는 뭔가 잘 못 들은 줄 알았어요. 늑대 같은 얼굴에 돌출된 광대뼈, 뱀처럼 능글거리며 말하던 그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그는 쓰레기일 뿐이었으니까요. 몇 년 후 무슨 사고를 쳤는지 경찰서에 들락거리더니 결국 몹쓸 병에 걸려 고통 속에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긴 했어요. 어느 현자의 말이 떠오르네요. ”복수를 하려 하지 말라. 자연이 그대를 대신해 줄지니."
여기 이 나라에서는 요즘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다른 나라에 비해 출산율이 훨씬 낮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다행스럽게 타인들의 이상한 시선이나 편견 없이 무탈하게 지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아내의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나 봐요. 어느 날 처형이 아내를 닦달해서 점집에 가자고 했대요. 점집이란 건 이 나라의 독특한 원시종교적 문화인데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해요. 어찌 되었든 아내는 처형과 함께 점집에 갔어요. 점쟁이는 그녀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자식이 크게 될 상이야.” 아내는 속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답니다. 몇 년 후 아내가 제게 말했어요. “여보, 우리 집 반려견도 자식이지, 개자식. 호호. 그런데 다른 애들보다 유달리 크지 않아? 어렸을 적에 당신이 고기를 참 많이도 먹였잖아. 그래서 살이 찌고. 이제 덩치도 산만하게 커졌고 말이야. 그러니 그 점쟁이 말이 맞는 것 같아. 자식이 크게 될 거라는 예언 말이야.”
크게 된 자식을 몇 년 전에 잃었어요. 수명이 우리보다 훨씬 짧았기 때문이죠. 아내는 반려견을 떠나보내고 오래 가슴 아파했어요. 상처가 아무는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인간들은 참 잔인하다 여겨지면서 또 어떨 땐 우리 크립토니안보다 더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한편으로 착각과 망상 속에 살아가는 측은한 존재들이라는 것도요.
어머니, 제 고향 크립톤 행성은 잘 있나요? 여기 지구로부터 42광년이나 떨어진 머나먼 그곳. 여전히 저녁에는 보랏빛 석양이 하늘을 물들이고 봄이면 샤로딘 꽃이 온 산과 들에 피어서 황홀한 향기를 날리고 있겠지요. 아침이면 무지갯빛 마이엘 새가 부르는 천상의 노래를 듣고 계시나요. 싱그러운 바람 속에 사계절 따스한 크립톤의 태양, 라오 항성의 빛을 쬐며 푸르른 들판에서 잠이 들고 싶군요. 아! 그리운 나의 고향 크립톤. 얼마나 보고 싶고 또 그리운지 모릅니다. 아련한 풍경과 정겨운 친구들을 떠올리며 눈물 속에 잠들던 날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는 걸 어머니는 아마 모르실 거예요.
오래전 슈퍼맨이라는 영화를 봤어요. 크립톤 사람을 전지전능한 존재로 그려 놓았더군요. 지구인들은 참 이상한 종족들이에요. 인간을 우상화하고 신처럼 숭배하는 경향이 있어요. 히틀러에 맹목적 충성을 바치며 같은 동족들을 학살하고 지도자를 터무니없이 미화하거나 숭배하며 심지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바치기도 하죠. 지금도 세상 곳곳에서는 어린이와 부녀자를 죽이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깟 좁은 땅덩이를 차지하기 위해서. 멍청한 지도자에 홀딱 빠져서 말이죠.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처럼 하늘을 날아서 비행기를 잡아채지도, 거대한 유조선을 들어 올리지도, 악당을 때려 부수지 못하는 나는 오늘도 무기력하게 그들이 벌이는 비극과 악행과 어리석음을 바라볼 뿐입니다. 나의 힘은 미약하고 해결해야 할 나의 고통은 벅차기만 할 뿐이니까요.
여기 인간들은 우리보다 훨씬 짧은 생을 살다 가면서도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아등거리며 싸우고 또 열렬히 사랑을 합니다. 느긋하게 생을 즐기면 좋을 텐데 다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죠. 마치 3배속 동영상처럼 말이죠. 인간들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채찍질하며 살아갑니다.
한 무리의 참새들이 서로 구분되지 않듯이 나의 눈에는 인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 눈부시게 아름답기만 합니다. 도토리 키재기 같은 차이인데도 그들은 조금 더 예뻐 보이고 더 많이 가지고 더 우월해지려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죠. 비교하고 경쟁하고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지닌 그들의 눈에는 그 사소한 차이도 크게 느껴지기 때문일 거예요.
크립톤 사람들이 지구인과 눈에 띄게 다른 점은 바로 물건이에요 이 나라에 살면서 목욕탕이란 곳을 가봤더니 남자들의 그것들은 모두 조그맣더군요. 그 이후 한 번도 목욕탕이란 곳을 다시는 찾지 않았어요. 신기하게 쳐다보는 지구별 뭇 남성들의 부러워하는 시선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죠. 저를 처음 발견했던 노인이 제 이름을 ‘대근’이라고 지은 이유를 그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어요.
크립톤을 떠나 지구에서의 삶을 이어가다 보니 나의 몸도 인간처럼 수명이 짧아지는 것 같아요. 여기 친구들과 비슷하게 늙어가고 있음을 문득 알게 되었죠. 아마 어머니가 지금의 저를 보신다면 비슷한 연배로 느끼실 거예요. 지구에 도착한 후 살아온 30년이 화살같이 지나간 것처럼 다가올 여생도 빠르게 흘러가겠지요. 늙고 병들고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기다릴 테지요.
어느 날 크립토니안들만 가진 영안의 눈으로 나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지구에서의 삶을 살아내며 여기저기 푸른 멍이 들어 있더군요. 가만히 그 멍든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앞으로도 잘 견뎌내라며 쓰다듬자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더군요.
어머니,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평안에 머무시기를 기원합니다.
멀리 푸른 별 지구 행성에서 불효자 칼 대근 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