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는 한쪽 벽에 붙어 누웠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녀도 나란히 누워 있음을 그는 느꼈다. 캄캄한 어둠과 적요만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공포와 흥분의 시간이 폭풍처럼 지나가자 좁은 공간에 웅크리듯 누웠고 암흑 속에서 건너편 그녀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마치 옆에 있는 듯 들렸다.
세 시간 전. 저녁 여덟 시. 찬 바람이 부는 도심의 거리에 어둠은 일찍 찾아왔다. 은행의 철제 셔터는 내려진 지 오래되었고 블라인드 너머에서 조그만 불빛이 새 나오고 있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퇴근했고 남은 이들도 시재를 확인하고 마감을 서둘렀다. 그는 돈통과 서류를 챙겨서 금고에 들어갔다. 안에는 이미 그녀도 들어와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가 미소를 건네자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화장실에 갔던 출납 직원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약속 시간이 지났는지 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며 서둘렀다. 금고 안으로 고개를 넣고 힐끔 쳐다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자 그는 육중한 미제(美製) 모슬러 금고의 문을 쿵 하고 닫았다. 금고 내부등의 스위치도 내린 후 외투를 챙겨 입고 급하게 후문으로 나갔다. 타임락이 걸린 금고는 이제 다음날 아침까지는 누구도 열 수 없었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금고 안에서 돈이 든 바구니를 넣고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캐비닛 뒤에 서 있었기에 금고 입구에서는 그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금고의 문이 닫혔다. 철컥하는 잠금 쇳소리가 울렸다. 순간 그는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고 옆에 서있던 그녀도 함께 비명을 울렸다. 안돼! 사람이 있어! 하지만 닫혀버린 두꺼운 철문 너머까지 목소리는 전달되지 못했다. 곧 불도 꺼졌다. 남자가 달려가 힘껏 쇠문을 두드렸지만 소용없었다. 캄캄한 어둠이 무섭도록 서늘하게 그의 곁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손바닥과 주먹이 피가 나도록 두들겼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이용해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오래된 수입산 쇠문은 기밀성과 소음 차단이 완벽했다. 외부의 침입만 생각하며 지은 벽체는 여느 벽보다 훨씬 두꺼웠다. 환기장치는 당연히 없었고 바깥으로 연결되는 것은 바늘틈 하나 없었다. 차가운 금속성과 퀴퀴한 돈, 서류 냄새가 밀폐된 공간에서 떠돌았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흐느꼈다. 남자가 달래며 말했다. 금고문을 닫은 직원은 이미 퇴근했을 거야. 고함치고 두드려도 소용이 없어. 꼼짝없이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야 해. 흥분하면 안 돼. 금고는 공기가 드나들 수 있는 미세한 틈도 없어서 산소가 부족해질지도 몰라. 말을 아끼자. 그는 한쪽 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반대편 그녀의 나지막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최대한 호흡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는 벽에 기대어 그녀와 서로 마주 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한 암흑.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차이가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도깨비불처럼 희미한 빛이 보였다 그 불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흩어졌다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였으며 거대하게 커졌다가 점처럼 작아졌다. 환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거기 있어? 나 방금 이상한 걸 봤어. 맞은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음을 머금은 채 떨리듯 전해졌다. 침착해 착시야. 남자의 목소리 파장이 검은 허공 속으로 금세 사라졌다. 금고 안은 다시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나 무서워. 여자가 말했다. 몇 시간만 참으면 돼. 눈을 감고 잠을 자. 한숨 자고 나면 출근한 직원이 문을 열어줄 거야. 남자가 대꾸했지만 내일 아침에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는 주변을 더듬어서 가방이나 종이 서류 등을 찾아 자리를 마련하고 누웠다.
남자는 지난날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갔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몇몇 기업체에 응시를 했지만 고배를 마셨다. 마지막으로 응시한 은행에 운 좋게 합격했다. 취업률이 높았던 시절이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 깊이 행복할 수 없었다. 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처럼 불편했다. 남들이 선호하는 직업, 앞다퉈 희망하는 회사에 휩쓸리듯 정신없이 뛰어들긴 했지만 도무지 마음을 붙일 수 없었다. 돈으로 그 공허를 채울 수도 없었다. 직업이란 삶의 대부분을 바쳐야 하는 일이기에 어긋난 연결은 오랫동안 당사자를 불행하게 할 것이었다. 사람들은 배부른 소리라 말하기도 했지만 그건 속물들의 비아냥일 뿐이었다. 그는 외로웠다. 바람이 불면 소리가 울릴 듯 헛헛한 자신의 빈 공간이 그를 구슬프게 했다. 문득 맞은편 여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희미한 그림자조차 구별되지 않았다. 까마득한 어둠이 마치 영원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들이 처음 만난 건 남자가 신입직원으로 지점에 발령이 났을 때였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저만치 뒤쪽에 서 있던 그녀. 갸름한 얼굴에 새카만 눈망울, 오뚝한 콧날. 그녀였다. 살짝 미소를 짓자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면서 입가에 조그만 보조개가 맺혔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어려있었다. 그의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며칠 뒤 퇴근을 하려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버스정류장까지는 한참을 걸어가야 했는데 우산 없이 갔다가는 옷이 모두 젖어버릴 것이었다. 기다리면 잦아들까 싶어 후문 처마 밑에 우두커니 선 채 퍼붓는 빗줄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같이 쓰고 갈까요? 복도를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그는 너무 반가웠다. 그녀의 우산을 넘겨받아 펼쳤다. 직급은 그가 높았지만 경력은 그녀가 더 많았다. 우산 아래 그녀의 은은한 향수 냄새가 났다. 어깨가 살짝 부딪힐 때마다 그는 가슴이 뛰었다. 카세트 노래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상 앞을 지날 때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들렸다. 그녀가 말했다. 나 저 노래 좋아하는데. 여자 친구 있어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공부하고 시험 준비 하느라 연애할 시간이 있었어야죠. 그녀는 살쩍 미소 지었다. 내 친구들 중에 예쁜 애들 꽤 있는데. 원한다면 소개해드릴게요. 아뇨. 한 가지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뭔데요?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저... 다음 주면 진해 벚꽃이 만개할 텐데. 벚꽃 보러 함께 가실래요? 취업하고 나면 멋진 여성과 벚꽃 구경을 가보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그녀가 대답했다. 전 멋지지도 세련되지도 않아요. 촌스러운걸요. 그가 반박했다. 아뇨.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런 멋이 느껴져요. 제게는. 그때 차갑게만 보이던 그녀가 크게 웃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쩐지 그는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마치 우산을 쓰지 않았던 것처럼. 씻고 자리에 누웠는데 신열에 든 것처럼 몸이 떨렸다.
그녀는 흰 블라우스를 입고 나타났다. 긴 머리를 곱게 빗어서 늘어뜨리고 터미널에서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가 달려가서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말했다. 착각하지 말아요. 그쪽이 좋아서 나온 건 아니니까. 오래 공부하느라 애인도 없는 남자의 소원 하나 들어주고 싶었으니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에요. 새침하게 말하는 그녀가 남자는 좋았다. 장복터널을 넘어가는 시내버스는 만원이었다. 구불거리며 올라가는 버스 차창이 갑자기 환해졌다. 벚꽃 잎이 온통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고 그녀의 짙은 눈망울에도 꽃빛이 어리어 반짝였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이 아름다운 지금에 멈출 수만 있다면.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회식이 있었다. 직원들은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십 여 미터가 넘는 소나무 세 그루가 마당에 심겨 있었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한 식당이었다. 소주가 먼저 나왔고 접시에 한가득 싱싱한 회가 나왔다. 머리가 하얗게 센 지점장의 인사말이 있고 나서 사회를 맡은 대리가 첫 발령을 받은 나의 소감을 물었다. 이곳에서 좋은 분들을 만나게 되어 기쁘고 반갑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은행원이라는 직업 속에서 자아를 성취하고 싶습니다. 자리에 앉았을 때 김 차장이 말했다. 자아성취는 개뿔... 돈 벌러 나온 거지. 열심히 벌어. 돈 먼지가 쌓이면 삼겹살에 소주로 씻어가면서 말이야. 냉소적인 말을 건네며 그는 초장에 찍은 회 한 점을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여러 사람들이 건네는 잔을 받아 마시고 나니 취기가 올라왔다. 화장실을 핑계로 잠시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 속에 갯내음이 실려왔고 저 멀리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아련했다. 식당 담벼락 너머 하천이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었다. 그 길이 그를 유혹했다. 그때였다. 희미하게 앞서 걸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자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였다. 여기서 뭐해요? 남자가 물었을 때 그녀는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냥. 바다가 보고 싶어서요. 남자가 물었다. 고향이 어딥니까? 남해. 바다가 보이는 마을. 부모님이 거기 아직 살고 있어요. 가난한 농부죠. 갑자기 동생들이 보고 싶어 지네. 그러면서 눈가를 슬쩍 훔쳤다. 내가 여상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했을 때 동생들이 무척 기뻐했었는데. 난 월급을 받으면 동생들 학비를 부쳐줘요. 힘닿는 데까지 공부시킬 거예요. 그게 내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쩌면 내 족쇄인지도 모르지. 그녀는 두 손으로 해풍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바다를 만나기까지 그와 그녀는 한동안 걸어야 했다. 여자가 말했다. 난 결혼 같은 거 안 할 거야. 남자가 싫어서. 혹시 날 꼬시려는 생각이 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그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누가 할 소리를. 그런 생각 전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가 따져 물었다. 그런데 왜 날 따라왔어? 남자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아니 그런데 말이 좀 짧네. 그녀가 대꾸했다. 날 졸졸 따라다니는 애송이니까. 남자가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 오해라니까. 난 그냥 화장실 갔다가 술 좀 깰까 해서 바다 쪽으로 걸었을 뿐이야. 그러다 앞서가던 그쪽을 만나게 된 거고. 그런데 결혼은 그렇다 쳐. 왜 남자가 싫은 거야? 그녀가 경직된 얼굴로 차갑게 대답했다. 그냥 싫어. 징그럽고 재수 없어. 그는 고개를 젖혀 하늘을 봤다. 별이 초롱한 밤이었다. 해안가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그의 심장처럼 펄떡였다. 그때였다. 허리에 차고 있던 삐삐가 울었다. 버튼을 누르니 불이 켜지면서 손톱만 한 액정화면에 ‘8282’라는 숫자가 떴다. 그는 횟집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금고 안은 완전한 암흑과 침묵만이 존재했다. 차가운 쇠냄새와 비릿하고 퀴퀴한 돈냄새. 구역질이 날만큼 짙어졌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녀의 삼키듯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말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그러자 여자가 귓속말을 하듯 작고 거칠게 말했다. 미칠 것 같아. 숨통이 조여 오고 갑갑해서 죽어버릴 것 같아. 벽이 점점 좁아져서 나를 질식시키고 말 거야. 추워. 너무 추워. 온몸이 떨려. 흐흑. 남자는 엉금엉금 기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팔을 잡았다. 차갑고 서늘했다. 그때였다.
악!...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가까이 오지 마! 안돼! 여자는 마치 무언가를 본 것처럼 말했다. 새된 비명이 좁은 공간에 가득 울렸다. 그녀는 누군가에게서 맞은 것처럼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면서 흐느꼈다. 내... 내가 잘못했어. 승준 씨. 용서해 줘.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응? 때리지 마. 그가 놀라 흠칫 물러섰다. 낯선 남자의 환영과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승준이라는 남자는 누굴까? 그가 남긴 깊은 상처에 그녀는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그는 그녀의 팔을 잡고 세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 난 승준이 아니야. 꿈이야. 환상이야. 흥분하면 안 돼. 천천히 숨을 쉬어. 곧 나아질 거야. 그녀가 경련을 일으킨 듯 심하게 떨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 여기 있어. 손을 뻗으면 되는 거리야. 무서우면 날 잡아도 돼. 그녀는 공황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두려움은 전염된다고 했던가. 남자도 공포가 거세게 밀려왔다. 이를 악물었다. 잠시 후 그녀의 떨리는 손이 그의 팔에 닿았다. 봄볕에 언 강이 녹듯 조금씩 마음의 빗장이 풀리고 있다는 걸 그는 느꼈다. 그가 천천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래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흐느낌을 멈춘 그녀가 남자에게 매달리며 말했다. 갑갑하고 무서워. 남자는 떨고 있는 그녀의 등을 말없이 쓸어주었다. 그가 말했다. 남자가 징그럽다면서 왜 날 안고 있지? 여자가 울음을 그치더니 그의 가슴을 두들기며 울음인지 웃음인지 흐느꼈다. 지금은 달라. 무서워.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이 방 안에 갇혀 있다는 거. 숨 막힐 듯 조여 오는 내 안의 공포가 죽음 보다 무서워.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어. 살아간다는 게 지독한 고통으로 다가오면 죽음은 차라리 구원인지도 몰라. 나 혼자였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니가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두려움의 눈물인지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풀려나는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승준은 내 첫사랑이었지. 운명처럼 만나서 비극으로 끝나버린. 내가 많이 사랑했던 것 같아. 그에게 매달릴수록 그는 점점 변해갔어. 내가 가난하고 동생들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지. 그가 다른 여자 사귀는 걸 알게 된 후 나는 더 매달렸어. 다시 돌아오라고. 내가 정말 잘해줄 거라고. 하지만 그는 매몰차게 나를 밀쳤어. 내 사랑은 진흙탕에 내던져졌던거야. 비참한 운명을 욕하며 나는 깊은 상처에 울부짖는 날들을 보내야만 했어. 그는 내 전부였으니까 말이야. 그가 나를 완전히 떠나버린 후 나는 결심했어. 두 번 다시 사랑은 없다고. 남자는 절대로 사귀지 않을 거라고. 남자는 결코. 절대로...
그녀의 고백이 끝나자 그는 가만히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그는 그녀의 눈물로 인해 자신의 가슴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짧았지만 그녀와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책을 좋아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기형도의 시집을 사랑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유재하의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고 김광석의 절창에 가슴 아파했다.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는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 그녀의 단골 찻집을 따라갔을 때였다. 디제이가 있었고 실내는 어두웠다. 테이블 위에는 작은 꽃병에 붉은 장미가 한 송이 꽂혀 있었다. 작은 부분 조명이 천장에서 꽃병만 비췄다. 테이블은 장미꽃이 등장한 연극무대 같았다. 선곡은 클래식과 재즈, 가요를 넘나들었다. 그녀가 말했다. 지금 우리는 사귀는 게 아냐. 우린 그냥 직장 동료일 뿐이야. 그가 대꾸했다. 누가 그러재? 이하동문이야. 당황해하는 그의 표정에 빙긋 웃으며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는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그녀에게 더욱 빠져들었다. 잘 통한다는 생각. 마치 한 몸이 되는 듯 느껴질 때면 묘한 전율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조금 가까워지면 밀어냈고 또 가까워지면 밀어냈다. 친해지고 가까워질수록 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강 같은 것이 았다는 것을 그는 어렴풋이 느꼈다.
숨이 점점 가빠왔다. 좁고 밀폐된 공간. 완벽히 봉인된 그곳은 이산화탄소로 점점 탁해져가고 있었다. 숨을 쉴수록 점점 갑갑해져 옴을 느꼈다.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몰려왔다. 두통이 오면서 정신이 조금씩 흐릿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지금이 몇 시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마치 영겁 속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이제 견딜 수 있는 한계 상황에 거의 다다랐다고 그는 느꼈다. 혼미한 안개 너머에서 그녀가 말했다. 너 내가 좋아? 그는 다시 의식이 돌아왔고 가만히 숨을 들이켠 후 내뱉듯 말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운명처럼.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속삭이듯 물었다. 왜? 나 같은 게 뭐가 좋아서? 그가 말했다. 나도 몰라. 너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눈물이 나. 그녀가 말했다. 안돼. 그러지 마. 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가 말했다. 남자는 싫다고 했지만 사람은 괜찮은 거지? 그냥 사람. 그렇게 받아주면 안 되겠니? 그녀가 하품을 하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은 지독한 착각이야. 우리 삶처럼 꿈과 같은 거야. 진실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강렬한 집착 때문이지. 사랑은 영원하지 않아. 짧게 타올랐다가 사라지는 유성 같은 거야. 그러니 날 잊어. 아... 잠이 와. 피곤해. 한숨 자고 나면 금고문이 활짝 열릴까? 아니면 영원한 잠에 빠져버릴까? 무엇이 열리든 어떻게 해결되든 넌 나를 버리고 다시 돌아가겠지. 안녕. 그가 대답했다. 문이 열려도, 영원한 잠에 빠져버리더라도 난 너와 함께 할 거야. 약속할게. 하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도 점점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철컥 소리와 함께 육중한 금고문이 열렸다. 캄캄한 암흑만이 가득 찼던 공간에 빛이 파고들었다. 그때였다. 외마디 비명이 울렸고 사람들이 달려왔다. 여러 그림자가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 위로 어른거렸다. 현금 수송용 가방을 꼭 끌어안고 있는 남자를 누군가 흔들었다. 그는 홀로 있었다. 119! 119를 불러. 야 찬물 가져와. 잠시 후 그는 앰뷸런스에 실렸다. 경광등과 사이렌을 울리며 질주했다. 은행 직원들이 차량의 후미등을 보며 수군거렸다. 일 년 전에 김양이 자살하고 또 이상한 일이 벌어졌네. 참 알 수 없어. 그러게 굿이라도 해야 하나.
구급차는 신호를 무시하며 빠른 속도로 인근 병원을 향해 질주했다. 그가 자주 들르던 찻집도 지났다. 2층 그곳에서는 이글스의 곡이 울리고 있었다. 차량의 진동 때문이었는지 그의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햇살이 그의 볼을 투명하게 비췄다. 살아났다는 안도감인지 그녀와 헤어졌다는 슬픔 때문인지 한 방울 눈물이 반짝이며 그의 볼을 타고 내렸다.
“체크아웃은 언제든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절대 떠날 수는 없답니다.”
이글스의 노래 한 구절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