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 타르트를 먹는 남자

소설

by 힉엣눙크

오전 환자를 보고 있던 그의 휴대폰에 카톡음이 울렸다. 육십 대 남성 환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있을 때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끝까지 내쉬세요. 네 좋아요. 잠시 숨을 참아 보세요. 환자와 상담을 마저 끝낸 후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늘 점심 같이 할까요?’ 그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두드렸다. ‘응, 거기서 12시 40분.’ ‘오키. 내가 예약해 둘게요’ 그가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자 옆에 서 있던 김 간호사가 힐끔 곁눈질을 했다. 과장님 에그 타르트 하나 드릴까요? 출근하면서 베이커리에서 샀어요. 그녀가 건넨 디저트를 한 입 베어 물자 바싹함 속에 눅진하고 부드러운 맛이 색달랐다. 커피로 입을 행군 그가 말했다. “다음 환자 들어오라 하세요.”


오전에 예약된 마지막 환자를 진료한 후 그는 가운을 벗었다. 오른쪽 가슴에 ‘내과 과장 김상혁’이라 새겨진 흰 가운을 옷걸이에 걸고 양복 상의로 바꿔 입었다. 진료실을 나서며 간호사에게 말했다. 식사 약속이 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러자 빠르게 그녀가 대답했다. 오늘 좋은 분 만나시나 봐요. 표정이 아주 밝으시네요. 마치 알고나 있다는 듯 넘겨짚었다. 그는 종합병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몰았다. 이윽고 한적한 골목길에 도착했다. 햇살은 따뜻했고 가로수 단풍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상혁이 걸을 때 구두소리가 조용한 거리에 울렸다. 큰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력 있고 균형 잡힌 몸매. 젊은 풋기를 벗어나 사십 대의 원숙함에 이른 남자, 묵직한 외제차를 몰고 다니지만 출퇴근 거리를 거의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의사. 자그마한 골목식당은 오래되었지만 외관이 깔끔했고 한눈에 맛집이라는 걸 짐작하게 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파스타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라탄으로 된 주황색 은은한 조명이 따스하면서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창가 가장자리, 흰 천이 덮인 테이블 위에 손깍지를 낀 채 턱을 괴고 있던 그녀가 손을 흔들었다.


박선영.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30대 중반 정신과 여성 전문의.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심하게 앓고 있던 50대 후반의 남자환자를 상혁과 협진할 일이 있었다. 차트를 보던 그녀가 말했다. 과장님. 진경제나 소화제만으론 알 될 것 같아요. 이 환자 외로움이 너무 크거든요. 상혁은 흠칫 놀랐다. 자신의 속을 들킨 것처럼. 그녀의 눈이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듯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때 콜 소리가 울렸고 그녀는 자신의 진료실로 달려갔다. 포르말린 속에 선영이 남긴 은은한 들장미 향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어느 날 상혁은 환자의 CT화면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제2의 뇌라는 대장. 뇌처럼 신경세포가 존재하며 뇌의 명령 없이도 자율적으로 활동이 가능한 장기. 뇌와 대장에 미주신경이라는 연결로가 있듯이 그녀와 긴밀히 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틈 날 때마다 스터디를 핑계로 병원 도서관에서 그녀를 불러 만났다. 그녀는 미용이나 운동, 재테크와 시댁과의 갈등처럼 삼십 대 후반의 여성들이 주로 이야기하는 지루하고 자잘한 사실들 혹은 소소한 감정의 나열에 머무르지 않았다. 평범한 이야기가 지적인 도약으로 종종 이어졌다. 그녀의 생각과 결은 남달랐다. 대화는 매끄러웠고 오랜 친구처럼 그의 마음속에 그녀가 깊숙이 자리 잡아갔다. 가슴 한켠에 거부할 수 없는 불꽃이 일기 시작한 것이었다. 상혁은 부나방처럼 그녀에게 이끌리고 있었다.


간 질환자가 입원을 했다. VIP 환자라 원장이 직접 챙기며 당부를 했었다. 이명규 삼광제철 회장. 칠십이 넘은 고령임에도 회사를 직접 진두지휘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내원해서 수술이 진행되었고 내과 병동에 입원 후 치료를 받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가 발작을 일으켰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내과적으로도 특이 소견이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발광을 하며 소리를 지르고 링거 줄을 뽑고 난동을 부렸다. 섬망이었다. 한밤중이었지만 상혁은 급히 선영을 불렀다. 미안한데 빨리 좀 와줘요. 곧 도착한 그녀가 환자를 살핀 후 약물을 투여했다. 거짓말처럼 폭풍은 가라앉았다. 냉철하면서도 침착한 그녀의 또 다른 모습에 그는 놀랐다. 환자가 곤히 잠아 빠지자 상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사람이 드문 새벽. 두 사람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근처 벤치에 앉았다. 상혁의 고맙다는 말에 그녀가 말했다. 날뛰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이 결국 수면제 하나 놓았을 뿐인데요 뭘. 의사가 하는 일이 때로 이렇게 허탈할 때가 많죠. 그녀의 겸손하면서 진솔한 매력에 그는 점점 빠져들었다. 사적인 만남이 시작된 건 그 일이 있고 난 후였다.


그는 식당의 묵직한 나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찰랑이는 머릿결, 희고 갸름한 얼굴에 반짝이는 눈망울.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오뚝한 콧날과 다부진 입술은 고집스럽게 보였다. 그녀가 아직도 미혼인 이유이기도 하리라. “시켰어?” “네.” 그는 손을 뻗어서 그녀의 왼손을 살며시 잡았다. 보고 싶었어? 치... 그냥 오늘 유난히 피곤한 환자들이 많았어요. 기분 전환 겸 위로를 받고 싶은데 생각나는 사람이 당신뿐이어서.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봉골레는 어디에 놓을까요? 종업원이 묻자 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자리에는 ‘라고 알라 볼로네제’가 놓였다. 상혁은 천으로 된 냅킨을 무릎에 깔고 포크를 들었다. 식사를 마치자 판나코타가 디저트로 나왔다. 그가 티스푼으로 잘라서 들어 올릴 때 조각이 미끄러져서 떨어졌다. 이크. 이거 꼭 묵같네. 아, 갑자기 시가 생각난다. 뭔데요? 사랑에 관한 시인데 제목이 뭐였더라... 묵집에서였던거 같애. 씁쓸한 뒷맛, 아슬아슬한 수저질, 미끄러져 상 위에 깨져버린 묵을 보면서 지난날의 사랑이 떠오른다는 거였는데. 참 맛깔스러운 시라서 오래 기억되더라고 게다가 묵을 먹을 때마다 그 시가 떠올라. 재밌네요. 상혁은 입안에서 매끄럽게 녹아드는 판나코타를 넘길 때 불안한 무언가가 스멀거리듯 느껴졌다. 그가 물었다. 환자들에게 항상 직면하세요. 수용하세요라고 말하는 당신이 스스로 정말 상처를 받고 자존심 상하고 외로울 때면 그땐 어떡해? 그녀가 익살스레 말했다. 이렇게 외치죠. 이 우라질 것들아! 다 뒤져. 뒤져 버리라고! 그가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상혁이 숨을 헐떡이며 이마의 땀방울을 훔치려던 때 그의 아내가 말했다. 아파. 빨리 끝내. 지안이 낼 시험이라 아직 공부하고 있을 거야. 순간 그는 뜨거운 기운이 차갑게 식으면서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누웠을 때 외로움과 무력감이 밀려왔다. 인턴과 레지던트를 거쳐 힘겹게 이 자리에 올라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인간도 동물임을 여지없이 알려주는 물리적 실체감이 비릿하게 몰려왔다. 남성이라는 자존심에 난 생채기는 쓰렸다. 쉬 아물 것 같지 않았고 오래 잠들 수 없었다.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을 때 그녀가 말했다. 김 과장님은 제가 왜 좋아요? 글쎄... 솔직히 자꾸 생각나면서 설레. 그녀가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예쁘니까, 착하니까라고 대답하지 않아서. 그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예뻐서 첫눈에 사랑에 빠졌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예전에는 간질을 앓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를 연결하는 뇌량을 절제했었죠. 그가 말했다. 서로 정보를 교환할 수 없었겠네. 그녀가 말했다. 맞아요. 실험을 주도한 교수가 환자의 왼쪽 눈에 웃기는 사진을 보여줬어요. 환자가 막 웃어댔죠. 깔깔거리고 웃는 그 환자에게 그가 물었어요. 왜 웃으시죠? 환자가 대답했어요. 선생님 넥타이가 너무 웃겨서요. 그때 상혁이 물었다. 언어를 관할하는 것은 왼쪽 뇌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른쪽 뇌가 웃는 이유를 왼쪽 뇌가 지어내서 말한 거죠. 요즘 AI가 보이는 할루시네이션처럼. 선영이 상혁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죠. 그냥 사랑을 하는 거예요. 사랑에는 직업도, 윤리도, 성도 나이도 인종도 빈부도 없어요. 이유를 찾는 일, 가리고 숨기고 외면하고 부끄러워하는 건 스스로가 둘러대는 거짓말이죠. 상혁이 말했다. 맞아 위선이야. 세상이 그러하듯. 다 꿈인 거지.


식당에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성이 부르는 재즈곡이었다. 섹시하면서 감미로운 곡조가 그의 마음을 말랑하게 했다. 그녀가 말했다. 로라 피기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 가을과 참 잘 어울려요. 좀 전에 과장님이 말해준 묵집에서라는 시처럼 이별한 사랑을 회상하는 듯한 목소리. 음악은 마법과 같아요. 따분한 일상을 달콤하게 변화시켜 주죠. 다큐를 드라마로, 불륜을 로맨스로 만들어 주지요. 상혁은 씁쓸히 웃었다. 그는 왼손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짧은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고 있었다. 그는 선영과는 반대편으로 걸어가 주차된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병원으로 돌아갔다. 다시 환자를 만나고 진단을 내리고 약처방을 했다. 그의 오후는 빠르게 흘러갔다. 거리에는 어느새 붉은 단풍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며칠 뒤 피곤이 몰려오는 오후 시간이었다. 진료가 끝나고 다음 환자를 부르기 전, 간호사가 건네준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상혁은 휴대폰을 들고 카톡을 열어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저녁 시간 나?’ 답이 바로 왔다. ‘네, 물론!’ ‘운동장 주차장 A구역에서 봐’ '넹‘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자 간호사가 말했다. 전공의 박선우 선생하고 최희진 선생이 썸 탄다는 소문이 있던대요. 그가 간호사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아요?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대답했다. 여기 병원에선 소문이 빛의 속도로 날아다니니까요. 썸 타는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거라 여기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죠. 호호. 눈치 빠른 김 간호사의 말이 마치 그와 선영의 관계를 다 알고 있음을 넌지시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되바라진 엉덩이를 보며 말했다. 다음 환자 들이세요.


운동장 A주차구역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의 흰색 차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가 내려서 손짓했다. 그녀가 주차를 한 후 그의 차에 옮겨 탔다. 그는 차를 몰아 외곽으로 나갔다. 고갯길을 구불구불 오르자 공터가 드러났다. 그를 따라 내린 선영이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 정말 좋아. 이 도시가 이렇게 아름답다니!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대로를 따라서 활주로처럼 가로등이 이어져 있었고 바둑판처럼 조성된 시가지가 별처럼 반짝였다. 강변을 따라서 휘돌아 나가는 불빛의 곡선이 자칫 밋밋하게 보일 수도 있는 야경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었다. 상혁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 어떡해? 선영이 말했다. 숨지 말고 솔직해져요. 우린 애들이 아니잖아요. 그가 대답했다. 혼란스럽고 두려워.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멈춰야 하는데, 어느새 액셀을 밟고 있어.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 그녀가 몸을 기대며 말했다. 사랑에 이유가 없잖아요. 그냥 사랑하는 수밖에. 상혁은 자신의 몸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가 말했다. 두려워. 우리 사이가 알려지면 내가 쌓아 올린 것들. 경력과 가정과 일과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무너질까 봐서.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겁쟁이.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속으로 좋아하고 상상으로 저지르는 일은 건전한가요? 노골적으로 즐기면서 편안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당신도 잘 알잖아요. 난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아세요? 정신과 의사니까 강해 보이나요? 나도 인간이에요. 두려워요. 외로워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당신이 그저 좋으니까. 내 감정이 이끄는 대로 따를 수밖에. 내가 발작을 일으키는 환자를 대하듯 우리 사랑을 냉철하고 똑똑하게 제어할 줄 아셨나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나도 사람이고. 여자예요. 감정의 실로 연결된 꼭두각시 인형, 바람에 흩날리는 갈대일 뿐이에요. 상혁 씨! 나... 아... 잡아줘요. 흐흑. 그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줄 뿐이었다.


야경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말했다. 하지만 고마워. 한 번뿐인 인생에 뜨겁고 소중한 사랑을 안겨준 당신에게 감사해. 나를 허락해 줘서. 그녀가 머리를 기대며 말했다. 지금은 그냥 받아들이자고요. 감정에 솔직하면 그걸로 족해요. 당신이 난 너무 좋아요. 단지 그것뿐예요. 오래 기다려온 사람이에요 당신은. 그래서 바보같이 전 멈출 수도, 떠날 수도 없어요. 당신은... 선영이 울먹이며 머뭇거렸다. 당신은... 내 마음을 타오르게 만든 유일한 남자예요. 선영이 상혁을 격하게 안았다. 탄력 있는 그녀의 몸이 맞닿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반짝이는 눈망울에 이슬이 맺혀 있었고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살짝 드러났다. 그는 입술을 포개고 그녀에게 깊이 잠겼다.


상혁이 늦게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갔다. 아내는 드라마를 보다가 소파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고등학교 영어교사인 그녀는 대학교 때 만났다. 그가 오랜 수련의 생활로 힘들 때 옆에서 지켜봐 주고 위로해 준 사람은 그녀였다. 소녀처럼 발랄했던 그녀가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피곤해서 쓰려져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이불을 가져와서 살며시 덮어 주었다. 상혁이 씻고서 아이들 방문을 열어보았다. 초등학생 아들은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건성으로 인사를 했고 중학생 딸은 친구와 SNS를 주고받으면서 문을 빨리 닫으라고 짜증을 부렸다. 그때 인기척에 깬 아내가 말했다. 언제 왔어? 방금. 왜 날 안 깨웠어? 단잠을 자고 있길래. 배 안 고파? 먹었어. 식탁 위에 에그 타르트가 놓여 있었다. 그가 물었다. 왜 아이들 안 주고? 요즘 애들 그거 안 먹어. 두쫀쿠가 유행이라며 지들끼리 그걸 사 와서 먹더라고. 그럼 이건 어디서 난 거야? 언니가 오늘 왔다 갔어.


그의 처형은 5년 전에 이혼을 했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자 자신도 맞바람을 피우고 급기야 헤어졌다고 했다. 아이들 각자의 뜻을 물어서 남자아이는 엄마와, 여자 아이는 아빠와 같이 살고 있다고 아내가 말했던 게 생각났다. 그는 아직 잠이 오지 않았다. 한 잔 더 하려고 셀러에서 와인을 한 병 꺼냈다. 잔에 따른 후 홈 바에 앉았다. 아내가 에그 타르트가 담긴 접시를 건네주며 말했다. 당신 안색이 안 좋네. 어디 아파?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니. 오늘 환자들이 많아서 피곤한가 봐. 아내가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뭘 잃어버린 사람처럼 얼이 좀 빠져 보여. 괜찮은 거지? 아냐. 괜찮다니까. 안방으로 들어가며 아내가 말했다. 그럼 다행이고. 나 먼저 잔다.


한 달 전, 선영과 시 외곽의 카페에 들렀을 때 커피와 함께 에그 타르트를 시켰었다. 그녀가 말했다. 몇 년 전 포르투갈 리스본을 여행하면서 제로니부스 수도원에 들렀었죠. 정말 아름다운 수도원이었어요. 하얀색 대리석과 아치문양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죠. 옛날 그곳 수녀들은 계란 흰자를 이용해서 수녀복을 빳빳하게 풀을 먹였대요. 상혁이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전에 쌀죽을 쑤어서 먹였잖아. 방식이 다르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수녀들이 풀을 먹일 때 흰자만 사용하다 보니 노른자가 남게 된 거죠. 그걸로 과자를 만든 것이 에그 타르트의 시초라고 하더군요. 상혁은 생각했다. 관습과 윤리는 어쩌면 에그 타르트 같다고. 용도와 쓰임을 위해 흰자와 노른자를 억지로 분리해서 흰자는 옷감에 노른자는 밀가루로 만든 과자 안에. 인간은 스스로 만든 제도와 관습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구겨 넣지. 선영이 말했다. 뭘 생각해요? 이 과자 먹음직스러워 보이지만 좀 슬프기도 할 거예요. 계란 입장에서는. 내가 흰자고 당신은 노른자 같아요. 그녀의 농담에 상혁은 웃을 수 없었다.


선영이 그에게 미국 연수 자리가 났다며 함께 떠나자고 제안을 했다. 상혁은 오래 침묵을 지켰다. 누가 봐도 모양새가 이상했고 소문은 무성할 터였다. 무엇보다 아내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완강했다. 남들 시선이 뭐가 두렵냐고, 우리의 감정에 충실하자며 우겼다. 하지만 상혁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잠에서 부스스 깬 아내가 왜 그러냐 물었을 때 브이아이피 환자 콜이 있어서 급히 가야 한다고 둘러댔다. 인천공항에서 그녀를 만났다. 수속을 끝내고 출국장으로 향할 때 그녀가 울면서 상혁의 품에 안겼다. 나... 이렇게 떠나고 싶지는 않아. 당신과 함께 가고 싶어. 정말... 정말 당신을 사랑해. 왜 당신은 나를 버리는데! 그녀는 눈물을 쏟았다. 그가 차분히 말했다. 아냐. 당신과 난 여기까지인 것 같아. 내겐 아이들과 아내가 있어. 어쩔 수 없어. 당신도 잘 알잖아. 이윽고 그녀는 앞선 사람을 따라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는 상위에 떨어진 묵, 미끄러진 판나코타 같다는 생각이 문들 들었다. 돌부처 같이 무표정하던 상혁이 돌아서며 지금쯤 그녀가 읊조리고 있을 주문을 생각했다. 이 우라질 것들아 다 뒤져. 다 뒤져버리라고...


그녀를 홀로 떠나보낸 후 상혁은 진료실을 지켰다. 직원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던 김 간호사가 넌지시 말했다. 김 과장님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으신가 봐요. 설마 박선영 과장님 떠나서 섭섭하신 건 아니죠? 호호. 아! 좋겠다. 누군 미국에서 연수도 받고. 근데, 그거 아세요? 젓가락으로 김치를 입에 넣고 씹던 그가 물끄러미 김 간호사를 보았다. 박선영 과장님 진료실에 꽃다발을 배달시키고 쫓아다니던 남자가 있었대요. 그 방 간호사가 그러는데 잘 생긴 사업가였다나봐요. 그런데 박 과장님이 거절했대요. 느낌으로는 누군가를 따로 만나는 거 같더라나요.


와인을 한 잔 마시고 애그 타르트를 집어 들었다. 빵이라는 성에 갇힌 노른자. 페이스트리의 바삭한 느낌과 묵직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하나를 더 집어 들어서 또 한 입 베어 물었다. 물컹한 노른자의 그 모호하고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느낌이 마치 자신처럼 여겨졌다. 그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반쯤 베어 물린 에그 타르트를 손에 쥐고서. 참아왔던 감정이 소리 없이 그의 몸 밖으로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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