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봄비가 제법 거세게 내리던 밤이었다. 퇴근을 하다가 술생각이 나서 집 근처 단골 이자카야에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손님이 없었다. 사장이 인사를 건넸다. 천장에 전구색 매립등이 일자로 줄지어 있었고 그 아래 나무로 된 카운터를 비추고 있었다. 출입구 바깥과 안쪽에는 일본식 붉은 초롱이 달려 있었다.
“비가 많이 와서 퇴근길 힘드셨죠?” 이마에 깊고 굵은 주름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이런 날 그냥 지나치시면 섭섭하죠. 오늘 시메사바가 좋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네, 그걸로 주세요. 그리고 준마이 도쿠리 하나 주시구요.”
“네~엣” 그가 바삐 손을 움직였다.
사장은 흰색 조리복 위에 검은색 앞치마를 둘렀고 머리에는 벚꽃 잎을 형상화한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다. 손이 두툼했고 입술도 두꺼웠다. 피부는 까무잡잡했는데 왼쪽 이마에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흉터가 있었다. 깊게 패인 얼굴 주름과 흰 귀밑머리 때문에 나이에 비해 더 늙어 보였다. 젊은 시절 고깃배를 탔다는 얘기를 이전에 들었었다. 고생을 한 흔적일 것이었다. 그가 술과 함께 자숙 완두콩인 에다마에를 먼저 내주었다. 접시를 건네던 왼손 새끼손가락 한마디가 잘리고 없었다. 하나로 길게 연결된 히노끼 테이블은 오크색으로 반질거렸고 손님들은 조리를 하는 요리사와 마주 보고 앉아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맨 안쪽 구석 자리를 잡고 앉아 사케를 한 모금 삼켰다.
그때 드르륵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우산을 접어서 빗물을 털고는 입구에 마련된 플라스틱 통에 차례대로 넣었다. 사장이 인사를 건네자 그들은 중간 자리에 앉았다. 오십 대 후반의 남자 세 명이었다. 나와 가까이 앉은 사람은 키가 크고 검은색에 붉고 가는 줄무늬가 들어간 양복을 잘 차려입고 있었고 머리는 단정하게 빗질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 사내는 중간 키에 뱃살이 나왔고 회색 잠바에 감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마지막에 앉은 사람은 뼈대가 굵고 덩치가 컸다. 스포츠머리에 눈빛이 날카로웠다. 물 빠진 청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걷어올린 소매에는 문신이 슬쩍 보였다. 양복을 입은 남자가 이 집 단골인 모양이었다. 모둠회를 주문하고 하이볼을 시켰다. 술이 나오자 건배를 하더니 셋이 함께 쭉 들이켰다. ‘크’하는 소리를 내며 각자 콩을 입에 털어 넣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야.” 양복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비가 오니 술맛도 좋네. 그치?”
“요새 일은 잘 돼가?” 잠바의 자크를 열자 불룩한 뱃살이 더 도드라진 남자가 말했다. “변호사들 요새 예전 같지 않다던데...”
“야... 술맛 떨어지게. 일 얘기 하지 마라. 사무실 임대료 겨우 내고 있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어. 중국 놈들이 들어와서 마음대로 장난질을 치지를 않나. 희망이 없어. 이 짓도 이젠 힘들어. 음주운전, 소액민사 이런 잔챙이만 처리하고... 아, 맞다. 너처럼 이혼하는 사람들 덕분에 내가 먹고 산다. 흐흐. 요즘 어떻게 지내?”
“우리도 힘들어. 아이엠에프 때보다 경기가 더 안 좋아. 외국인들 아니면 공장 못 돌려. 불법체류자들이 더 싸게 먹히는데 관리도 힘들고.” 남자가 자신의 아랫배를 쓸면서 말했다. “피 터지게 일하고 돈 벌었더니 자식새끼들하고 마누라는 지들만 생각하더라고. 빌어먹을. 이혼하니까 속이 다 시원해.”
“황제골프 가서 동남아 애들이랑 놀고...” 양복 입은 남자가 잠바를 입은 남자의 얼굴에 새끼손가락을 들이대며 익살스레 말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걸 만들어서...”
“힘도 좋아. 그런데 마누라한테 들키기는 왜 들켜...” 스포츠머리를 하고 팔뚝에 문신이 있는 남자가 끼어들었다.
“남자가 사업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여편네가 그것도 이해 못 해. 뼈 빠지게 일하면서 지 호강시켜준 게 누군데. 나도 참 많이 외롭고 서러웠어. 날 돈 벌어주는 기계로 알더라고.” 똥배를 한 남자가 대답했다.
“넌, 아직도 일수하냐?” 양복 입은 남자가 팔에 문신을 한 남자에게 말했다. “이제 이 바닥에서는 너도 원로가 다 됐지 아마? 주먹 원로. 흐흐”
“나도 어엿한 사장이야. ‘벼락부자 컨설팅’이라고 회사 하나 차렸다.” 그가 친구들에게 명함을 건네면서 말했다. “그래도 이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전주야.”
그때 드르륵 문이 열리고 삼십 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녀 한쌍이 들어왔다.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여자는 긴 머리에 보통 키로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흰색 셔츠에 트위드 재킷 그리고 검정 와이드 슬랙스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남자는 헬스를 하는지 덩치가 컸고 구레나룻을 길러서 나름 멋을 부리고 있었으며 회색 셋업 슈트에 같은 색 타이를 걸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우산을 통에 넣고 분위기를 살피더니 문쪽에 자리를 잡았다. 남자가 모리아와세와 하이볼을 시켰다. 그들은 말이 없이 창밖을 응시하며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주 두 병 주세요.” 팔에 문신이 있는 남자가 옆에 앉는 젊은 여성을 유심히 살피다가 사장에게 말했다. 건네받은 소주병을 잡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소주잔에 부어주고 자신은 맥주잔을 달라고 해서 가득 부었다. “니들 미숙이 생각나?” 그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대답이 없었다. 양복 입은 변호사는 그 얘기를 뭐 하러 꺼내냐는 듯 문신한 남자를 째려보았다.
“어제 내가 천희동에 들렀다가 밥을 먹었는데 식당 여주인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더라고. 누굴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밥을 먹었어. 그러다가 번뜩 생각이 일면서 하마터면 수저를 떨굴 뻔했지 뭐야. 미숙이였어. 세월이 너무 흘러서 많이 변했지만 모습은 그대로였지. 어릴 때 참 예뻤는데. 새카만 눈썹에 복숭아처럼 약간 붉은빛이 도는 하얀 얼굴. 미다리골 그 미숙이.” 그때였다. “쨍그렁” 카운터 너머 사장이 접시를 바닥에 떨궜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접시를 들어 올렸다.
미숙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머지 둘은 동시에 말했다. “정말이야? 설마.” 그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자 용문신 비늘이 꿈틀거렸다. “참 나. 못 믿어? 그 미숙이였어. 내가 밥을 다 먹고 나서 계산대에서 그 식당 여주인에게 물었어. ‘너, 미숙이 맞지?’ 그때 그 여자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라고. 사기꾼인지 무언지 저울질을 하듯이 말이야. 한동안 뚫어지고 쳐다보가다 눈에 초점이 잡히나 싶더니 말하더라고. ‘승권이...?’ 내가 고개를 끄덕이니까. 씩 웃대.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갈 때까지 가만히 쳐다보면서 웃기만 하는 거야. 내가 출입문을 벗어나서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굵은소금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라. 뒤를 돌아보니 미숙이가 문 앞에 서서 바가지에서 소금을 집어 들고 나를 향해 던지고 있더라고. 내가 어이가 없어 소리쳤지. "야이 씨팔년야.” 남자는 소주를 다시 맥주잔에 붓고 한숨에 마셨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 우리는 철없던 중학생이었으니까.” 잠바를 입은 남자가 대꾸했다. “아냐. 고등학생이었어. 재윤이가 후안고등학교로 유학을 가 있다가 2학년 여름방학을 맞아서 시골 촌구석에 들어왔을 때였으니까. 내가 정확히 기억해.” 문신을 한 남자가 말했다. “그런가? 어쨌든 시내 영화관에 놀러 가는 길이었지.” 문신을 한 남자가 양복 입은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랬었나? 기억이 없어.” 양복 입은 남자가 힘없이 대꾸했다.
“한참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지. 아... 그 물소리 아직도 생생해. 양동이에서 돌바닥에 떨어지는 ‘차르르’하는 그 소리 말이야. 미숙이 집을 지나칠 무렵 그 소리가 들렸었지. 영석이하고 내가 받쳐주고 네가 담 너머를 살폈었잖아.” 문신을 한 남자가 말했다. “그랬었나?” 양복을 입은 남자가 소주를 한 잔 들이켜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기억나지 않아. 난 모르는 일이야. 그때 나는 거기 없었을 거야. 니들이 착각하고 있어.”
그러자 잠바를 입은 남자가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웃기지 마. 넌 분명히 우리와 함께 있었어. 니가 그걸 잊었다고? 사법고시까지 패스한 머리 좋은 니가? 소가 웃겠다.” 그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담장 너머를 니가 보자고 하지 않았으면 그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새꺄.” 그러자 문신한 남자가 말했다. “니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 뭔가에 홀린 듯 상기된 표정이었지. 얼이 빠지고 눈빛이 살짝 무서웠어.”
“맞아. 우리는 영화고 뭐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니가 하자는 대로 미숙이 집 대문으로 들어서서는 안채 뒤쪽에 있는 우물가로 향했지.” 잠바를 입은 남자가 말했다. “장독대에 숨어서 바라봤어. 새하얀 알몸을 말이야. 그년은 조숙했지. 몸매가 정말 빛이 나더구먼. 황홀했어. 우리는 세 마리 이리떼처럼 미쳐 있었어."
문신을 한 남자가 말했다. ”미숙이가 몸을 닦고 쪽문을 통해 뒷방으로 들어갔어. 우리가 아쉬워하면서 돌아서려는데 재윤이 니가 말했지 ‘덮치자’고. 이제 기억나?"
양복 입은 남자는 물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말했다. ”난 기억나지 않아. 모르는 일이야. 40년도 더 지난 일이야. 사람의 기억이란 불안정해서 종종 착각하기도 하지. 이제 그만해."
그러자 문신을 한 남자가 말했다. ”지랄하고 있네. 이게 아주 법꾸라지네. 우리한테도 말이야. 미숙이가 낮잠에 곯아떨어졌을 때 네가 우릴 부추기면서 한 말이었잖아."
”난 모르는 일이야.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 양복 입은 남자가 다시 대답했다.
그러자 잠바 입은 남자가 말했다. "네가 틀림없이 말했어. 난 아직도 생생히 기억해. ‘야! 니들 둘 망을 봐. 내가 먼저 할게. 누가 오면 신호를 해.’ 그랬던 놈이 누군데! 야, 이거 완전 악질이네. 대 놓고 나쁜 짓 하는 승권이 같은 놈들보다 양복 입고 고상한 척하면서 호박씨 까는 너 같은 놈들이 더 미워."
”거기서 왜 내 이름이 나와?" 승권이라 불린 문신을 한 남자가 화를 냈다.
”난 기억이 안 나.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많이들 취했어. 그 얘기 그만하자." 양복 입은 남자가 얼굴을 찡그렸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그때 조리를 하던 사장이 슥슥 소리를 내며 숫돌에 사시미 칼을 갈았다. 오늘따라 마치 손에 잡히는 것들을 모조리 썰어버리겠다는 듯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문신을 한 남자는 이야기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제일 억울하지. 니들 둘 재미보고 내 차례가 돼서 막 덮치려는데 가만히 있던 그 년이 그제야 제정신이 드는지 눈에 초점을 맞추고 나를 노려봤어. ‘승권이? 이러지 마. 왜 이래. 무슨 짓이야.’ 아랫도리는 벌겋게 피로 젖은 채 말이야. 내가 망설이면서 엉거주춤하고 있을 때 인기척이 들렸어. 문을 살짝 열어보았지. 그년 아버지가 돌아오고 있는 거야. 웃기는 건 니들이야. 날 내버려 두고 먼저 도망을 쳤어. 야 이 배신자들. 나는 알몸인 채로 옷을 집어 들고 고방문 쪽으로 빠져서 담을 넘어 튀었지. 뒤에서 ‘이놈의 새끼. 네가 누군지 다 알아’하며 소리치는 게 들렸어. 그러더니 야 이 년아. 이 미친년아. 그러면서 지 딸을 줘 패더라고. 그년의 비명소리가 도망치던 내 뒤통수에 꽂혔어. 며칠 뒤 우리 아버지가 조용히 나를 불러서 뒷산으로 데리고 갔어. 다짜고짜 싸리나무로 사정없이 후려쳤지. 니 죄를 네가 알렸다 그러면서. 아주머니 뻘 친척인데 니가 인간이냐며 아버지가 소리쳤지. 매 앞에 장사 없다고 내가 다 실토를 했지. 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억울하다고. 그 이후로 아버지는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 모두 조용히 그 사건을 덮었지. 왜냐고? 니 아버지가 우리 마을 이장이었고 너는 천재니 수재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들리는 소문에는 내가 다 한 것으로 돼 있더라고. 참 나. 기가 차서."
세 사람은 한 동안 말이 없이 술만 홀짝였다. 내가 주문한 시메사바는 시큼하고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와사비를 살짝 올려 한 점 입 안에 넣고 사케로 씻으니 깔끔하게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너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자랐어. 그년은" 이윽고 양복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표가 나게 바보는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자랐지. 니들도 잘 알잖아. 약간 모자랐어." 면죄부를 얻으려는 듯 그가 반복해서 읊조렸다.
”얼굴이 반반해서 시집은 잘 갔던 모양이야. 남편이 괜찮았대." 잠바를 입은 남자가 회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걔가 참 부지런했잖아. 장사도 잘했다더군. 아버지가 일찍 죽자 동생들 공부를 지가 다 시켰대. 지금 천희동에 있는 그 식당도 자기들 가게래. 그 금싸라기 땅에 말이야."
문신을 한 남자가 말했다. ”소문에 미숙이 짝사랑했다던 이웃 마을 청년이 있었다던데, 갑자기 그 기억이 떠오르네. 그 자식이 미숙이한테 고백했었는데 미숙이가 안 받아줬나 봐. 그 자식 홧김에 배를 탔다지 아마."
그때 카운터 너머에서 조리를 하고 있던 사장이 이마에 잔뜩 주름을 지었다. 사시미를 뜨다가 잘 못 썰어서 생선살이 뭉개지고 말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계처럼 회를 뜨던 그였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실수였다. 그가 칼질을 멈추더니 컵에 물을 따라 마셨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들이 말한 미숙이라는 여자가 운영하는 음식점을 나도 알았다. 그 지역에서 꽤 알려진 맛집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친절했고 처음 개업을 했을 때의 그 맛을 잃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찜집이었다. 몇 달 전에 친구들과 그 집을 찾았을 때 음식을 내어오는 여주인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매일 새벽 일찍 어시장에 나가서 제일 싱싱한 것을 직접 찾아야 직성이 풀린다고 했다. 물건이 좋지 않으면 통영이나 거제로 바로 달려간다고 했다. 손님에게 대접하려면 그래야 한다면서 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가게를 떠날 때 주방에서 도마를 탕탕거리며 아귀를 직접 손질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문신을 한 남자가 얼큰히 취해서는 옆에 앉아 있던 여성을 보며 말했다. ”아까 들어올 때 사실 좀 놀랐어. 미숙이 많이 닮았네. 진짜." 그러면서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야 다들 한 번 봐봐." 옆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이 봐 젊은 친구, 당신 여친은 괜찮아? 정상이야? 머리도 몸매도. 흐흐." 구레나룻을 기른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가씨, 저런 얼간이는 놔두고 나랑 같이 한 잔 더 하는 건 어때?" 그가 혀가 꼬인 채 시비를 걸었다. 구레나룻을 한 젊은 남자가 얼굴이 시뻘게져서 소리쳤다. ”영감탱이 노망이 들었나. 너는 싸가지가 없어. 인성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 술 곱게 처먹어." 문신을 한 남자가 구레나룻 남자의 멱살을 잡았고 둘은 주먹질을 할 기세였다.
그때, 테이블 너머에서 사장이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칼 맞기 싫으면 조용히 있어." 사시미 칼을 숫돌에 슥슥 갈면서 그가 말했다. 왼쪽 눈 위에 있는 흉터가 씰룩거렸다. 그 기세가 워낙 사납고 드셌다. 하지만 둘은 흥분해서 감정을 누그러뜨릴 생각이 없어 보였고 욕설을 하면서 서로 밀고 당겼다. 그 와중에 의자가 넘어지고 잔이 깨졌다. 그때였다. 사장이 가운터를 훌쩍 뛰어넘더니 둘을 떼어냈다. 문신한 남자의 멱살을 잡더니 순식간에 쓰러뜨렸다. 엄청난 완력이었다. 유도나 주짓수로 오래 단련한 실력임이 분명해 보였다. ”뭐야 이거... 놔.. 켁.“ 꼼짝없이 깔린 남자가 짓눌렸다. 갑갑한지 기침을 하며 헐떡였다. 팔뚝의 용문신이 꿈틀거리면서 저항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윽고 지쳤는지 포기한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형씨, 나도 젊었을 땐 ‘생활’ 좀 하면서 큰집 담벼락 구경도 하고 다녔어. 나이 들수록 몸조심해. 알았어? 특히 주둥이 조심하고." 문신을 한 남자 위에 올라타고 있던 사장이 말했다. 밑에 깔려 있던 남자는 눈만 껌뻑이면서 가만히 있었다. 그제서야 사장은 일어섰다. 그러자 변호사 친구가 카운터에 돈을 던졌고 잠바 입은 친구와 함께 문신을 한 남자를 부축해서 밖으로 나갔다.
"얼마예요?" 구레나룻을 기른 젊은 남자가 계산을 하려 했다. ”미안합니다. 그냥 가세요. 음식값은 안 받겠습니다." 사장은 고개를 숙였다. 삼십 대 커플도 가게를 떠났다. 정적이 흘렀다. 내가 주문한 사케병은 벌써 비어버렸고 안주도 동이 나 있었다.
가게는 조용했다. 나는 술이 부족하다 느꼈다. 사케를 더 시킬까, 안주도 주문할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변호사라던 양복 입은 남자의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그년은 모자랐어.’ 그들이 떠난 자리를 보았다. 어지러이 널려있는 안주 부스러기, 이리저리 흘린 소주, 그들이 내뱉었던 과거와 현재의 부끄러운 흔적들. 누가 모자라는 사람인가? 도대체 모자라는 사람은 누굴까?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사장이 청소를 위해 일찍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며 내게 양해를 구했다. 겉옷을 입고 계산을 하자 그는 소주를 마시면서 비 내리는 창 밖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어지럽혀진 테이블과 바닥을 그는 망연히 놓아두고 있었다. 상처 입고 실패하고 헤매다닌 그의 지난 인생처럼.
우산을 챙겨서 가게 현관문을 나섰다. 천장에 매달린 홍등에 붉게 물들여진 문은 부드럽게 열리고 닫혔다. 기름칠 덕분이리라. 이 도시를 움직이는 수많은 연결부위에 끼어있는 질척한 구리스처럼, 더럽고 끈적하고 시커먼 것들이 이 거리 이 공간 어딘가에 들러붙어 나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비 치고는 너무 많이 내렸다. 구멍이 뚫린 듯 굵은 빗발울이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아직도 모자란다는 듯 비는 끝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도로 옆 배수로 밑에 쌓여 있던 쓰레기들이 불어난 물줄기를 따라서 떠올랐다. 솟아난 쓰레기들이 도시의 거리를 빙글빙글 떠돌고 있었다. 오수관도 역류하면서 더럽고 시큼한 냄새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을 받아 그 모든 것들이 번들거렸다. 나는 비 오는 거리를 이리저리 떠돌며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