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가운데 ‘몽고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시민들은 이 우물의 존재를 거의 모두 알고 있지만 실제로 가 본 사람은 몇 안된다. 그냥 우물이기 때문이다. 그 우물물이 질병 치유의 효과가 있다거나 마시면 대학에 합격한다거나 하는 미신이 있었다면 아마도 주변의 돌들은 사람들의 왕래로 반질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몽고정에는 그런 사연이 없다. 그 이름만으로 오랜 옛날 우리 민족이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는 아픈 역사를 상기시켜 줄 뿐이다.
‘몽고정’은 고려말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일본 정벌을 목적으로 합포(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한 진(鎭)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라 추정된단다. ‘몽고정’의 원래 이름은 ‘고려정’이었는데 1932년 일본 고적보존회가 ‘몽고정’이라는 표지석을 세운 후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몽골의 일본 정벌은 일본 측에서 보자면 승리한 전쟁이었다. 침략자들이 수도에는 이르지도 못하고 스스로 패퇴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침략자들이 일본으로 출발했던 그곳. 일본인들은 거기를 찾아 기념하고 싶었을 것이다. 침략자의 흔적을 또 다른 침략자가 기린 자리. 당시 고려인들이 팠을 그 우물은 병사의 대다수를 이루던 고려인들이 주로 사용했을 터인데 지금은 ‘고려정’ 대신 ‘몽고정’이라고 불리고 있다.
마산에 몽고 대신 ‘고려’라는 명칭이 들어간 50년 넘은 빵집이 있다. 오래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화제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마산 출신으로 분한 등장인물들의 대사 속에서 언급되기도 했었다. 서울로 치자면 명동거리 한복판에 위치한 유명 제과점쯤 될 것이다. 그 빵집은 당시 마산 최고의 번화가 창동에서 약속 장소로 흔히 이용되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꼭 빵을 사 먹지 않더라도 그 집 앞은 만남을 위한 자리였고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던 핫플레이스였다. 세월의 변화와 함께 신생도시 창원에 상권을 넘겨준 창동은 어느덧 쇠락했고 지금은 ‘창동예술촌’으로 힘겹게 부활 중이다. 다행히 그 빵집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웬일인지 자꾸 다래끼가 생겼다. 눈이 퉁퉁 부어 도저히 그냥 둘 수 없는 지경이어서 병원에 가야 했다. 학교를 마치고 엄마와 함께 버스를 타고 중앙극장(지금은 사라졌다.) 밑에 있는 안과를 찾았다. 마취 없이 눈꺼풀을 칼로 찢고 고름을 짜내는 등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오는 치료였지만 그렇게 싫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지는 않다. 왜냐면 엄마는 병원 치료 후에 꼭 고려*에 들러서 빵을 사주셨기 때문이다. 요즘 빵집을 가보면 오픈된 진열장에 수많은 종류의 빵이 있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고르고 싶은 빵을 스스로 쟁반에 담아서 사 가지만 당시에는 단팥빵, 크림빵, 소보루, 고로케, 카스텔라, 밤과자 등등 모든 빵들이 지금의 베스킨*** 아이스크림 가게처럼 유리 진열장 안에 들어 있었고 종업원에게 먹고 싶은 빵을 가리키면 쟁반에 담아주는 형태였다. 빵집에 들른다는 건 귀한 외식이었다.
엄마와 내가 마주 앉은 테이블에 우리가 주문한 빵과 우유가 올려졌다. 단팥빵을 급히 먹다 목이 메어 우유를 마시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드시지도 않고 가만히 지켜만 보고 계시던 엄마의 모습이 그제서야 보였다. 항암치료로 가발을 쓰고 계셨던 엄마는 수척하고 낯설었다.
“엄마 없어도 공부 잘하고... 동생들과 잘 지낼 수 있겠지?”
엄마는 담담히 물었다.
“왜 그런 소릴 해?”
“아니... 병원에 또 오래 입원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입퇴원을 반복하던 엄마의 투병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엄마도 얼른 나아서 빨리 집에 와야 해?”
엄마는 대답 대신 급히 고개를 돌리고 눈을 바삐 깜빡이셨다.
빵집을 나서면 엄마는 부림시장이나 어시장을 들러서 장을 보기도 하셨다. 물건을 몇 번이고 들었다 놨다 하셨고 몇백 원 깎자고 상인들과 실랑이를 하셨다. 조그만 지갑에서 동전을 세고 또 세셨다. 나는 서점을 지나칠 때면 소년잡지를 사달라고 철없이 졸라대서 엄마를 곤혹스럽게 만들기 일쑤였다. 반은 이기고 반은 졌다.
수백 척의 목선이 떠 있는 합포만. 시월 스산한 바람에 갯벌 갈대숲은 일렁이고 병사들은 고향의 가족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을 것이다. 1,274년 잠실경기장을 가득 메우고도 남을 사만여 명의 병력들이 조그만 어촌 합포만에 집결했던 것이다. 몽골군, 한족군, 고려군이 있었다. 육지에서 바라보는 합포만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을 터.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이로 인한 떨림은 그 풍광을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중국어 몽골어를 쓰는 병사들 사이로 고려의 젊은이들은 잔잔한 고국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목선들을 바라보며 원나라의 명에 따라야 하는 서글픈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쿠빌라이가 고려에 요구한 900척. 기한에 쫓겨 급히 만드느라 채 마르지 않은 목재들을 사용한 배, 강나루에 사용하던 목선들, 배 모양으로 생긴 것들은 모두 억지로 불려 와서 집결해 있었을 합포만은 그제껏 볼 수 없었던 수많은 배들로 일대 장관을 이루었으리라.
원과의 항전으로 극한까지 피폐해진 고려, 복구를 위한 노력은 커녕 다시 원나라의 일본 정벌 전쟁에 동원된 민초들. 이들이 겪었을 참담함은 불을 보듯 훤하다.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항구에 울려 퍼지고 왜(倭)와의 전쟁을 위해 출항할 배에 오르면서 병사들은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을 것이다. 쿠빌라이의 야욕에 내몰린 여원연합군 소속 고려인들은 제1차 일본 정벌에서 3명 중 1명은 돌아오지 못하고 전사했다.
어울리지 않는 가발을 쓰고 희미한 미소로 대문을 나서며 나의 등을 두들겨 주시던 엄마도 자신의 몸속에 들어앉은 병마와의 전장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셨다.
마산만의 짙푸른 바다는 지금도 말이 없다. 왔다가 떠나가는 무수한 사람들과 시절들. 바다는 그들의 피와 눈물을 말없이 거둬들이고 수용할 뿐이다. 인생의 뱃고동이 울리면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 그맘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자주 상기해 두자. 지금 내가 마주한 바람 한 점, 풀꽃 하나, 그리고 눈빛 나누는 바로 이 사람이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보석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몽고정’을 알고 있지만 정말로 본 사람은 드물다. 나에게 엄마가 그랬다. 알고 있지만 정말로 알지는 못했던 사람.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던 사람. 마치 영원히 볼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