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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집을 선물했다.

by 힉엣눙크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삼십 대 후반의 사내들이 음식점에 모였다. 자글거리는 삼겹살 불판을 가운데 두고 소주 한 병을 고기가 익기도 전에 비웠다. 각자 안부를 묻고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들을 안주 삼아 술잔을 연신 기울였다. 가정사, 직장 스트레스 그리고 주식과 부동산 투자 등등이 한 상 넘쳐났다. 주로 재태크에 관한 얘기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간간이 학창 시절과 군대 이야기. 누군 어디서 출세했다더라. 누구는 방송에서 자주 보이더라 등등. 그리고 다시 재산증식에 관한 이야기로 흐르고... 그러다 “사는 게 뭐 있나.. 한 잔 하자”면서 잔을 부딪쳤다. 대화 속에 꾹 묻어놨던 속내를 슬쩍 내비치기라도 하면 저마다의 경험담과 치유책이 처방되기도 했다. 그러면 딱딱하게 붙어 있던 고민들이 전자레인지에 3분 돌려 말랑해지는 냉동실 떡처럼 노곤히 풀려서 떨어져 나가기도 했다. 내장을 제외하고 서로 다 들여다본 친구들과의 수다는 인생살이 속에서 겪는 갑갑한 체증에 소화제 같은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한 친구가 문득 말했다. “야 우리 동호회 주택 같은 것 만들어서 나중에 함께 시골 들어가 살자.” 다들 시골 출신이던 친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신이 나서 맞장구를 치며 동의했다. 당시에는 동호회 주택이 이슈가 되던 시절이었다. 장소는 어디로 할 것이냐, 한 동네에 모여 살면 심심할 틈이 없겠다는 둥 우리는 그 주제를 놓고 한참 신나게 떠들었다.


밤이 깊어지고 자리를 옮긴 우리들은 마이크에다 각자의 불안과 회한을 힘껏 내질렀다. 대화는 번번이 노랫소리에 묻혔고 우리는 서로 제 말만 했다. 부르는 곡들은 벽에 붙어 있던 커다란 포스터 속 인기 100곡 목록을 벗어나지 않았다. 마흔을 목전에 두고 ‘서른 즈음에’를 읊조렸고 가본 적도 없는 카스바의 여인을 목 놓아 외쳤다. 자정쯤에야 쉰 목을 부여잡고 노래방 문을 나섰다. 여전히 비는 또닥거리며 아스팔트를 적셨고 네온사인의 울긋불긋한 불빛들이 그 위에서 번들거렸다. 우리는 빗줄기 속으로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방금 불렀던 노래가 환영처럼 남은 귓전에 ‘잘 가’ ‘다음에 보자’라는 외침이 멀게 느껴졌고 삼십 대의 생이 구렁이 담 넘듯 세월의 담을 넘고 있었다.


그때도 살기 바빴던 친구들은 오십 중반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살기 바쁘다. 바뀐 게 있다면 뱃살에 여유가 상당해졌다는 것이다. 도원결의하듯 동호회 주택을 꼭 만들자고 큰소리치던 친구들은 언제 그런 얘기를 했었나 싶게 무관심해졌다. 은퇴해도 실행에 옮기지 않으리라는 건 이제 말 안 해도 다들 잘 알고 있다. 마누라 때문에 시골 못 간다는 말을 새 옷에 붙은 상표처럼 나풀거리면서 그들은 주름진 얼굴 위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 여섯 친구 중에 유일하게 나만 시골에 들어왔다. 같이 살든 흩어져 살든 자주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요즘은 코로나로 마지막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하다. 같이 살자던 친구들은 이제 각기 살기 바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옛말이 그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 되뇌게 된다. 쉰을 훌쩍 넘기고 세월은 무섭게 질주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면 그만큼 섭섭해질 일들도 많아진다. 내가 어떻게 일했는데... 내가 얼마나 해줬는데... 내가.. 내가.. 나의 아집은 더욱 굳어져 가고 세상의 대접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점점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의 흐름 속에 점차 설 자리를 잃고 밀려나고 있음을 스스로 체감하고 있다. 안간힘을 쓰면 쓸수록 그래서 더욱 외롭다.


새집은 작년에 만들어 두었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설계도를 참고해서 나름 정성을 들였다. 목재상에서 두꺼운 나무합판을 사고 전기 직소와 직각자, 드릴 등을 샀다. 따스한 봄 햇볕 속에서 뚝딱거리며 만드는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념무상으로 쏙 빠져있었다. 마치 어릴 때 프라모델을 조립할 때처럼 말이다. 완성작을 지붕 위에 올려두었으나 새들은 그곳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처마 밑 기와 구멍에 둥지를 틀뿐이었다. 섭섭했다. 괘씸한 참새들 같으니. 하지만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 나만의 생각에 빠져서는 새들의 생태도 고려하지 않고 제 고집대로 만들어 제 뜻대로만 설치하고서는 결국 외면받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난 주말 방치해 두었던 낡은 새집을 수리했다. 마이너스 피까지 내세우며 분양을 유도했건만 텅 빈 빈집. 이제 그들에게 미련을 두지는 않으련다. 나는 만들었고 선택은 온전히 새들의 몫이다. 낡은 새집의 먼지를 털고 부서진 곳을 고쳐서 사다리를 놓아 꽃사과나무 위 높다란 가지에 걸어 두었다. 아래에서 새집을 올려다보니 제법 운치가 있고 스멀스멀 아이 같은 동심이 피어올랐다. 나무 위의 집 같기도 하고 사람의 집을 미니어처로 축소해서 나무에 걸어 둔 것 같기도 했다. 어릴 때 냉장고 종이박스에 문을 내고 집처럼 만들어 그 속에서 들어앉아 소꿉놀이하던 생각도 났다. 그때는 작은 돌멩이도 상상으로 채색되어 반짝였고 요정의 숲과 과자로 만들어진 세상으로 향하는 비밀의 문이 어딘가에 있는 듯 여겨지기도 했었다. 현실이 꿈이고 꿈이 현실이었다.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었다. 나무 위의 집. 아늑하고 따스한 나무의 질감. 동그란 창문을 통해 파랗게 부서지는 새벽 햇살에 눈을 뜨고 풀쩍 뛰어올라 밖을 내다본다. 나무 위에서 시원스레 보이는 앞산과 들판. 봄 햇살을 받아 곧 터질 듯 반짝이는 산수유 꽃망울. 초록의 동박새는 기지개를 켜고 세상을 향해 날아간다. 바람이 날개깃을 부추겨 힘들이지 않고 하늘로 비상하면 마을이 내 발아래 조그맣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는 상쾌한 기분, 높은 고도가 가져오는 적막함과 아찔함만 있을 뿐이다. 아픔도 외로움도 슬픔도 없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온 세상. 아! 그것만이 내 세상인 것이다.


꽃사과나무 가지에 걸린 새집은 찾아올 때마다 이마가 조금씩 넓어지는 그 친구에게 선물할까 한다. 고민이 있을 때면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집. 슬프면 구석진 모퉁이에서 한참을 울고 가는 집. 외로우면 둥근 창으로 달빛을 바라보며 한 잔 하는 집. 기쁠 때면 가지에 앉아 목청껏 재재거리는 집. 힘들면 바닥에 누워 힘을 빼고 한 없이 늘어질 수 있는 집. 갑갑하면 파란 하늘로 맘껏 날아오를 수 있는 집. 아플 땐 엄마품처럼 편안해서 치유가 되는 집. 비가 오면 아늑하게 둥근 창으로 내리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집.


친구여... 여기 당신의 영혼이 동심으로 돌아가 편히 쉴 수 있는 새집(birdhouse)을 드리노니.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능력은 전적으로 당신의 마음에 달렸거늘. 소유하소서 나의 선물을. 누리소서 당신의 꿈을, 즐기소서 당신의 자유를.


삼십 대 후반 우리가 꿈꿨던 동호회 주택은 이제 내가 모두를 대신해 이루고자 한다. 제2호 제3호 집도 곧 제작에 들어가고 새봄에 분양할 예정이다. 친구들이여 줄을 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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