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앞두고 막바지 가지치기를 하다가 단풍나무 위에서 빈 새둥지가 찾았다. 가느다란 가지들로 얼기설기 엮어서 만든 둥지는 성냥개비 더미처럼 손대면 바스러질 듯 연약해 보였다. 새둥지 하면 익히 연상되는 국그릇 형태의 모양이 아니라 마치 평평한 접시같이 허술한 둥지였다. 귀퉁이를 잡고 살짝 당겨보았더니 쉬 무너지지도 않고 제법 튼실했다. 비바람에도 여태껏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둥지를 보니 서글퍼졌다. 숨어있던 사연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작년 오월경이었다. 연둣빛으로 물오른 단풍잎이 한창 자라나서 풍성하게 나무를 덮고 있었다. 집 근처에서 멧비둘기가 짝짓기를 하느라 연일 울어댔다. 구~구구... 구~구구... 마치 루이 암스트롱의 그르렁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이를 잃어버리고 며칠을 서럽게 울어 굵게 쉬어버린 서른 여자가 토해내는 통곡 같기도 했다. 눈이 맞은 멧비둘기 한 쌍이 쉬엄쉬엄 그 나무에 자주 드나들었다.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잠시 쉬어가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머무는 날들이 길어지자 호기심이 일어 나뭇잎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안쪽을 들여다본 나는 흠칫 놀랐다. 비둘기 한 마리가 둥지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단풍나무인 데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높이에 둥지를 튼 것이 안쓰럽고 한편으로 어이없기도 해서 나는 못 본 척 슬며시 피해 주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단풍나무는 정원 한가운데 있었고 우리가 차를 마시기 위해 즐겨 찾는 아지트 바로 근처였다. 자주 지나다녀야만 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오가는 사람의 인기척에 위협을 느껴 곧 떠날 것이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며칠 지나 그곳을 다시 살펴보았더니 어김없이 그 비둘기의 흑단같이 새카맣고 조그만 눈이 지척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박제 인형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둥지를 틀지 않은 멧비둘기였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비둘기 한 쌍은 한 번 튼 둥지를 목숨 걸고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아지트에서 아내와 내가 앉아서 쉴 때면, 알을 품고 있던 비둘기는 몇 시간째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저렇게 오래 교대 없이 혼자서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거의 한 마리가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바로 옆에서 크게 떠들거나 웃어도, 손 닿을 거리로 스치듯 지나다녀도 구구 거리는 울음소리나 조그만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힘찬 날갯짓으로 자유자재 날아다니던 멧비둘기가 몇 날 며칠 곡기를 끊은 수도승처럼 꼿꼿이 앉아 있었다.
내가 웃거나 큰소리를 낼라치면 자제를 시키곤 하던 아내는 둥지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허술한 신접살이 새댁 같다’고 했다. 대나무 바구니 모양 야무지고 맵싸한 솜씨로 지은 뱁새의 둥지를 여럿 보아온 우리에게 허술하니 곧 바스러질 듯하고 평평하니 엉성한 멧비둘기 둥지는 불안하다 못해 안쓰러웠다. 둥지의 모양이 성기고 어설퍼서 암수가 자리를 바꿔 앉는 서슬에 알이 굴러 떨어질 듯 아슬하게 느껴졌다.
왜 알이 깨어나지 않을까? 뭔가 잘못된 듯했다. 한 달이 지나도 지속되는 멧비둘기의 포란을 두고 우리는 의아스러웠다. 정보를 찾아보니 비둘기는 대개 20일 동안 알을 품으면 깨어난다는데 우리 집에 들어앉은 비둘기는 한 달이 지났건만 알을 부화시키지 못했다. 사람도 열두 달 지나 늦게 나오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그럴지도 모른다 여겼다. 하지만 거의 두 달이 가까워졌을 때 우리는 알이 잘못됐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멧비둘기 부부는 장마철을 맞아도 떠날 줄 모르고 빗줄기 속에서도 젖은 채 굳건히 둥지를 지켰다. 우리는 점점 신경이 쓰였다. 가만히 살펴보니 암수 교대도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았다. 뭔가 문제가 커져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말라 가는 비둘기를 향해 아내는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응원의 말을 건네곤 했다. 새 생명을 향한 견인과 인고의 시간을 독하게 지속하는 힘이 저 조그만 몸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우리는 애처로움을 넘어 생명의 경이로움에 숙연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둥지에서 멧비둘기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결국 새끼를 포기하고 떠나갔구나 하고 생각했다. 불쑥 우리 곁으로 와서 둥지를 틀었던 그들이 새끼를 부화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무사히 돌아가 주기를 바랐는데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함에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엉성한 빈 둥지를 바라보며 어디에선가 그들이 다시 튼실하게 둥지를 짓고 무사하게 새끼를 부화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아내는 ‘잘 가 비둘기들아!’하고 숲을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본격적인 한여름 더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장마가 지나자 풀들은 무섭게 자랐다. 아내는 부지런히 정원 여기저기 웃자란 풀들을 뽑아냈다. 구역을 나눠 순차적으로 풀을 뽑았다. 한꺼번에 다 뽑으려고 조급하게 욕심을 부리면 지치게 된다. 꽃과 나무에게 인사도 하고 흥얼흥얼 노동요도 부르면서 무던히 뽑아야 이긴다. 풀에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풀과의 전쟁에서 지치거나 포기하려는 내 마음을 이기는 것이다.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내의 “앗” 하는 외마디 소리가 들려서 쫓아가 보니 풀을 뽑던 호미를 내팽개치고 아내는 뭔가를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놀란 눈으로 물었을 때 아내는 손가락으로 단풍나무 밑에 있는 초화류 사이 풀숲을 가리켰다. 다가가 살펴보니 새의 깃털이 보였다. 몸통은 거의 썩어 없어지고 깃털만 비둘기 형상으로 남아 있었다. 왜 여기 이렇게 떨어져 있을까? 고개를 올려다보는 순간 전기가 찌릿하게 오는 듯했다. 그곳은 몇 주 전에 떠났다고 생각했던 멧비둘기 둥지 바로 밑이었다. 그 멧비둘기 한 마리의 주검을 예상치 못하게 접하고는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여기 이렇게 죽어 있을까? 짝이 갑자기 사라져서 더 이상 교대해 줄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던 것일까? 그래서 굶어 죽었나? 그래도 죽을 건 또 뭔가. 떠나면 그만이었을 것을.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충견에 관한 전설이나 이야기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새끼를 향한 비둘기의 순절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죽음의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사실은 멧비둘기는 자신이 낳은 생명을 죽기 직전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새 생명을 부화하려다 끝내 목숨을 버렸다는 것이다. 가슴 한쪽이 아릿했다. 생명을 잉태해서 키워내려는 본능이 조그만 비둘기에게도 엄혹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무섭고도 슬펐다. 아내는 깃털만 남은 멧비둘기를 들여다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다. 계절의 파고를 넘으며 생명은 서럽고 끈질기게 살아낸다. 왜 생명은 겁도 없이 삶이라는 운명을 또 넘겨주는 것인지. 그것도 눈물겹게 슬프도록. 그 본능의 알 수 없는 위대함이 새삼 사무쳐오는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