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외롭거나 쓸쓸할 때면 간혹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중에 한 사람 바로 자야 아지매다. 그녀는 말할 때면 코맹맹이 소리가 나던 12살 단발머리 소녀였다. 송아지처럼 눈이 크고 맑았다. 몸이 날래서 쇠꼴을 잘 뜯었고 산과 들에 나는 것들 중에 먹어도 되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능숙하게 구별해 낼 줄도 알았다. 자야 아지매를 처음 본 건 내가 6살 무렵 시골 할머니 댁에 살게 되었을 때였다. 도시에 살다 온 나는 동네 아이들과 서먹했다. 할머니는 나보다 6살 많은 여자아이에게 인사를 시키면서 누나가 아니라 아지매라 부르라고 했다. 나보다 촌수가 빠른 그 아지매에게는 나를 잘 챙겨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정원이 울리모 지기삔다. 알겠나?”
배꾸마당에 옹기종기 모여서 놀이를 시작하려는 아이들에게 자야 아지매는 야무치게 쐐기를 박았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까까머리에 시커먼 얼굴의 사내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덩치도 컸다. 집성촌 마을에서 아이들은 다들 가깝거나 먼 일가친척이었다. 할머니 집은 아랫동네와 윗동네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집 근처 돌무더기가 산처럼 쌓인 곳 옆에 제법 너른 마당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배꾸마당이라고 불렀다.(배꾸마당은 바깥마당의 경상도 사투리다.) 동네 아이들은 주로 그곳에 모여서 놀았다. 마당에서 놀다가 돌무더기산을 올랐다.
장정 두세 명이 겨우 들어 올릴 수 있을 정도의 돌이 쌓여 있던 돌무더기에 관해 묻는 나에게 할머니는 옛날 삼신할매가 정병산 정상에서 바위를 하나씩 회초리로 탁탁 쳐서 쌓아 올렸다고 했다. 삼신할매가 돌을 쌓아 올린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이웃집 죽동 할매가 돌무더기 앞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종종 손바닥을 비비며 축원을 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막연히 알 수 있었다. 돌을 휙휙 날릴 정도의 슈퍼파워에 우리는 기대고 싶도록 나약하다는 것을.
아이들은 돌무더기의 신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배꾸마당과 돌무더기 그리고 앞산과 들판은 지겹거나 싫증이 나는 법이 없는 우리의 네버엔딩 놀이터였다. 우리들은 배꾸마당에 막대기로 선을 긋고 오징어 놀이를 했다. 편을 갈라 공격과 수비를 나누어서 깨금발로 혹은 양발로 뛰고 당기고 밀면서 하는 신나는 놀이였다. 나이가 어리거나 불편한 아이들은 깨금발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례를 부여받기도 했다. 그 놀이에 소외되는 아이는 없었다.
수비가 한눈을 파는 사이 나는 깨금발로 강을 건너려고 했다. 하지만 눈치를 챈 상대편에게 한쪽 팔을 붙잡혀서 끌려 넘어질 위기였다. 그때 어디선가 쏜살같이 나타난 자야 아지매가 나를 홱 낚아채더니 상대편 남자아이에게서 나를 떼어 놓았다. 자야 아지매는 또래 사내들과 힘겨루기를 해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능가했다. 놀이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위기에 처할 때면 슈퍼맨처럼 나타나 구해 주었고 아웃되었을 때에도 종횡무진 상대편을 제압해서 금세 해방시켜 주었다. 심지어 나를 자신의 옆구리에 끼고 적들의 거센 공격을 뚫고서 오징어 강을 건네주기도 했다. 나는 오징이놀이를 할 때면 항상 자야 아지매와 같은 편이 되었다. 자야 아지매는 마치 후견인처럼 나를 챙겨주었다. 사내아이들과 함께 하는 거친 놀이도 주저하지 않았던 섬머슴 같은 자야 아지매는 나에게 영웅이었다.
오랜만에 시골을 방문한 부모님은 배꾸마당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던 나를 처음에 알아보지 못하셨다. 새카맣게 그을려 있던 나를 발견한 엄마는 깜짝 놀라는 듯했다. 몰려온 아이들을 둘러보다가 “니가 자야구나. 원이 보살펴줘서 고맙다.” 엄마는 자야 아지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안방에서 흰색 운동화를 내게 건네시며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집에 같이 가자.”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자 도시로 데려가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과 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도시에 가면 다시 낯선 아이들과 적응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아직 학교 갈 때가 멀었으니 그냥 둬라.” 고개를 젓는 나를 보시고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다시 나를 남겨두고 돌아가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부모님은 아예 시골로 이사 오셨다. 아버지가 인근 도시로 직장을 옮기셨고 시골에서도 출퇴근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나의 시골살이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아이들과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강아지처럼 온통 뛰놀 수 있어 그저 행복했다.
삼 학년 새 학기를 맞을 무렵 부모님과 함께 도시로 이사를 가야 했다. 떠나는 나를 향해 빨간 눈을 한 채 손을 흔들어주던 자야 아지매는 그 후 만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콘크리트 골목길에 적응해야만 했다. 하지만 꿈을 꾸면 언제나 나무와 풀벌레 가득한 시골이었고 배꾸마당에서 오징어 놀이를 하던 동무들 생각은 지문처럼 떠나지 않았다.
얼마 전 자야 아지매를 우연히 만났다. 겉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어릴 적 모습이 녹아있는 여인을 본 순간 뜨거운 기운이 목까지 차올랐다. 초로의 아지매는 늙고 자그마했다. 나보다 크고 강했던 소녀는 손주를 둔 작고 평범한 보험 아지매가 되어 있었다. 송아지 같던 눈매의 자야 아지매는 남편도 자식도 옆구리에 차고 세월의 파고를 깨금발로 힘차게 건너뛰었을 것이었다. 보험 하나 가입하고 싶다는 내게 “다음에”라고 말하며 그녀는 활짝 웃었다. 체구는 내 기억보다 훨씬 작아져서 이제는 내가 그녀를 옆구리에 끼고 깨금발로 내달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자야 아지매는 여전히 당당하고 힘이 셌다. 내 유년의 추억 속에서 그녀가 차지하는 의미를 설명하려다가 대신 배꾸마당과 돌무더기의 안부를 물었다.
매미소리 울려 퍼지는 가로수길을 걸어서 그녀는 멀어져 갔다. 7년을 땅속에 살다가 한 달을 울고 사라지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시절의 허망함과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꽃사과나무에 달린 과일이 점점 붉어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이 계절을 무엇으로 채워나가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