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다란 빗방울이 버석버석 마른땅에 물풍선 터지듯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예보에도 없던 비가 갑자기 찾아왔다. 나는 순간 ‘앗’ 소리와 함께 급히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빨랫대에 널어놓았던 옷들을 서둘러 걷어서 들어왔지만 머리와 몸은 이미 젖고 말았다. 곧 빗줄기가 본격적으로 쏟아졌다. 이글대던 햇볕에 달궈진 지붕 위 기와에서는 연기처럼 수증기가 모락거렸고 처마 끝의 낙수물은 폭포처럼 떨어졌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빗줄기는 거세게 쏟아져 내렸다. 쏴아~ 하는 빗소리는 모든 소음들을 삼켜버렸다. 아내와 나는 창밖 너머로 빗방울이 점령한 세상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비멍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굵은 빗줄기를 뚫고 마당 끝에 조그만 비글 한 마리가 살랑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생울타리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옆집 개의 모습을 보자 아내가 말했다. “이웃집 개가 또 들어왔어!” 갈색과 검정의 얼룩, 큼지막하게 축 늘어진 귀 그리고 슬픈 듯하면서 장난꾸러기 같은 눈동자를 가진 이웃집 비글이 갑작스러운 비를 앞세우고 우리 집을 방문했다. 마치 팡파르를 울리며 긴 망토를 입고 위풍당당 행진곡에 맞춰 입장하는 꼬마대장의 퍼레이드 같이 비현실적으로.
이웃집 개는 마당 한 귀퉁이에 설치한 울타리 안에다 놓아기르는데 평소에는 헛짖음도 없이 얌전히 있는 편이다. 그런데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그 높은 펜스를 뚫고 대문을 넘어 우리 집으로 왔다. 이중 삼중의 장벽은 비와 함께 찾아드는 간절한 염원 앞에서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 듯했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은데도 불구하고 뛰어야 벼룩이요 날아야 부처님 손바닥이듯 녀석은 우리 집 반려견 은달이를 운명처럼 찾아왔다. 두 마리의 해후는 눈물겨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짝사랑이었다. 이웃집 비글이 불가능한 장벽을 넘어왔음에도 은달이는 시큰둥했다. 사랑은 어쩌면 오해와 욕망 그리고 집착인지도 모른다.
우리 이웃도 이제 자신의 개가 탈주를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가봐야 옆집 마당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비가 많이 오는 날만 골라서 게다가 불가사의한 탈주극을 감행하면서 우리 집에 오는 것일까. 우리 부부는 이런저런 분석을 해봤지만 딱히 정답을 찾지 못하고 그냥 가설 몇 개만 세워두었다. 외적 요인은 물론이고 내적 요인도 있을 것이기에 이를 끝까지 분석하자면 아마도 논문 한 편은 족히 되고도 남으리라.
시골에서 비가 올 때 간혹 마당에 미꾸라지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거센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듯 미꾸라지가 강한 빗줄기를 타고 오르다 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다른 의견으로 빗줄기를 탄다는 것은 와호장룡 영화에서 주윤발과 장쯔이의 대나무 결투 장면 같이 비현실적인 얘기이고 사실은 강한 바람과 기압차에 의한 용오름 현상으로 인해 물고기가 하늘 높이 빨려 올려졌다가 비와 함께 떨어졌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는 창자 호흡이 가능한 미꾸라지가 빗물의 흐름을 거슬러 땅 위를 기어올랐다가 마당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우리 부부는 비와 함께 출몰하는 이웃집 비글을 보며 시골 마당에서 미꾸라지를 발견하는 당혹스러움과 같은 기이한 느낌을 가졌다. 세상에는 사실을 명명백백히 밝혀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코 알아낼 수 없는 일도 있고 또 굳이 밝히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기도 하다. 여러 설이 분분한 미꾸라지 승천 현상처럼 비가 오면 우리 집을 찾아오는 이웃집 비글의 방문은 그냥 미스터리의 세계에 두려고 한다.
말기암에 걸린 노인이 의절한 아들을 죽기 전에 만나고 싶어 하지만 아들은 거부하고, 딸에게 잔혹한 상처를 준 아버지는 자살하려 하고, 그 딸은 어렵게 찾아온 사랑을 아버지 때문에 거절하고, 첫눈에 반한 사랑에게 거절당한 경찰은 괴로워하고, 모든 이로부터 소외받고 무시당하는 왕년의 퀴즈왕은 분노로 스스로를 파괴하고...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1999년 영화 매그놀리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상처 받고 상처 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고 관계 속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로 인해 괴로워한다. 도미노처럼 얽히고설킨 관계망이라는 거미줄에 걸린 곤충들처럼 헤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운명의 사슬은 더욱 옥죄어 올뿐이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절망의 나락으로 치닫는 그 순간 하늘에서 난데없이 개구리 비가 내린다. 말 그대로 개구리가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천창을 뚫고 떨어진 개구리가 자살하려는 자의 권총을 쥔 손에 툭 떨어지고, 절망으로 움츠러드는 소년에게 치유의 웃음을 주고, 말기암 환자가 운명하기 직전 감았던 눈을 떠서 아들과 화해하고 떠나게 하고, 사랑을 포기하려는 자에게 용기를 줘서 사랑이 이뤄지게 한다. 마지막 순간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용서하고 그리고 운명 같은 짐을 벗어 버린다. 심각하고 뒤틀리고 고통스럽고 무겁고 어두운 마음의 짐들이 개구리가 비처럼 내리는 환상 같은 마법에 의해 기적처럼 벗겨져 내리는 것이다.
영화는 고르디아스 매듭같이 질기고 고통스러운 상처의 굴레를 알렉산더 대왕처럼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좀체 상처와 갈등을 단박에 벗어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개구리가 쏟아지는 비처럼 지금 온 세상은 바이러스 비가 내리고 있지만 내적 성장이나 평화, 기후위기대응 등 지구촌 공통의 문제 해결을 위해 인류가 전격 합의했다는 소식은 애석하게도 아직 듣지 못했다. 사람은 관계없이 살 수 없지만 그렇다고 관계를 떠날 수도 없고 관계 속에서 헤매면서 상처를 서로 주고받는다. 사르트르가 말했다고 한다. “타인은 지옥이다.” 어찌하랴 그 지옥 같은 타인을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용서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 잊히고 소외된 왕년의 퀴즈왕 도니가 경찰관인 짐에게 말한다. “나는 나누어줄 사랑은 많은데 누구에게 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 한마디 말을 들은 짐은 다시 사랑을 고백할 용기를 얻게 된다. 때로 위대한 명언보다 적절한 시기에 맞이하는 평범한 말 한마디가 더 큰 힘을 줄 때가 있다. 차를 타고 주행하는 도로에서도 인생의 조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할 때가 있다. “양보”, “사고위험 천천히”
비가 오면 미칠 듯 보고 싶은 사랑을 찾아오는 이웃집 비글. 그 녀석을 바라보던 나는 사랑을 위해 그렇게 용기를 내어 행동했던 적이 있었던가 하고 되짚어 보았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누구에게 그처럼 뜨거웠던 적이 있었느냐’ 던 안도현 시인의 일갈처럼 뜨끔했다. 이제 그처럼 뜨겁지 않다 하더라도 남은 나날들 속에서 미움과 질투 성냄보다 내 안의 사랑을 늘 함께하는 사람들과 보다 많이 나눌 수 있기를 바래본다. 그리고는 미꾸라지 비, 개구리 비처럼 이웃집 비글의 왕림이 내 마음에 쌓인 무엇을 마법같이 풀어주지는 않았는지 슬그머니 기억의 서랍장을 여기저기를 뒤적거려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