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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석기인이라고?

by 힉엣눙크


추석을 맞아 동생네와 함께 차를 타고 성묘를 가는 길이었다. 감나무 과수원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은 제법 노랗게 물들어 있었고 들판의 벼들도 고개를 숙였다. 동생이 차장 너머로 스쳐 지나는 근교의 시골집을 바라보며 저런 땅은 얼마씩 하냐고 물었을 때 내가 대답했다.


“여긴 아마 평당 250만 원쯤 할 테고 저 집은 대략 250평가량으로 보이니까... 4억2천5백이군.”


동생네는 내가 계산이 빠르다며 놀라워했다. 잠시 후 동생이 말했다.


“그런데 형. 250평에 평당 200만 원씩만 해도 5억인데... 계산이 뭔가 잘못된 것 같아.”


어처구니없는 나의 암산 실력이 들통나자 모두 웃었다. 아내는 저런 능력으로 어떻게 학교는 졸업하고 직장은 들어갔는지 모르겠다며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동생이 거들었다.


“형님의 계산은 정말 빨랐습니다. 다만 정확하지 않았을 뿐이죠.”


모두들 또 한 번 깔깔대고 웃었다. 간단한 덧셈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습관이 있다 보니 어느덧 나의 머리는 점차 퇴화해 버렸나 보다. 우주관광을 하는 시대인데 나는 구석기인이 되어가는 듯하다. 이전에는 전화번호도 수십 개씩 외워두곤 했는데 요즘은 휴대폰 저장 기능 덕분에 전화기를 열지 않으면 가까운 지인의 번호도 알 길이 없게 되었다. 아직 인공지능의 시대가 본격화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우리는 일상생활 깊숙이 많은 정보와 판단을 기기에 의존해 버렸다.


목적지에 다다랐을 무렵 길옆에서 어느 농부가 플라스틱 박스에 빨갛게 익은 뭔가를 수확해서 쌓아두고 있었다. 그 장면을 유심히 보고 있던 내게 뒷좌석에 타고 있던 동생이 물었다.


“여기도 개발이 된다고 하던데 언제쯤인지 알아?”


내가 말했다. “꾸지뽕이다!”


나는 고향의 개발계획을 묻는 동생의 질문은 귓등으로 듣고 차장 너머 농부의 수확물에 집중하다가 꾸지뽕나무의 열매인 것을 알아채고 나도 모르게 그처럼 외쳤을 뿐이었다. 욕설처럼 들리는 어처구니없는 답변에 동생을 포함한 모두는 다시 왁자하게 웃고 말았다.


나와 동생, 각자의 말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만 서로 우연히 교차하면서 우스꽝스럽게도 의미의 왜곡이 빚어지게 되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의 질문에 노승이 ‘뜰 앞의 잣나무’라 대답했다는 선문답도 아니고 마치 코미디 프로그램의 상황극처럼 되고 말았다.


바야흐로 수확의 계절이 다가왔다. 일전에 동생 부부가 강원도에 여행을 갔었다 한다. 잣나무 군락을 호젓하게 걷던 중 떨어진 잣을 발견한 제수씨가 채집하는 재미에 푹 빠지는 바람에 여행의 목적이 휴양이 아니라 농활이 되고 말았단다. 시골 출신인 제수씨는 고추, 딸기 등 채소나 과일을 거두는 일에 아주 능했다. 보통 사람들보다 두 배는 손이 빨랐다. 게다가 수확하는 것을 좋아할 뿐 아니라 즐기기까지 했다. 우리 같은 범부들은 그녀를 이길 수가 없었다.


지난봄 우리는 게으름 탓에 정원 매실나무 수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제수씨가 다녀간 다음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무에 매실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동생은 그런 능력을 보이는 자신의 아내에게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구석기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크게 될 인물이었을 것”이라며 놀렸다.


사실 우리 현대인들의 몸에는 구석기 시절의 디엔에이가 강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구석기 시절이 차지하는 기간이 절대적이었고 진화를 하기에는 이후의 시간이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만 우리의 몸은 아직도 구석기 시절에 맞춰져 있다. 뱀 사진만 봐도 소름이 돋고 벌레는 질색이며 맛집 탐방이 여행의 핵심이라면 그건 당신의 몸이 구석기인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증좌일 것이다.


아침잠에 못 이겨 늦게 일어나곤 하던 나도 이제는 새벽에 종종 눈이 떠진다. 해가 뜨려면 멀어서 아직 날은 컴컴하다. 대문 앞에는 주인 없는 큰 밤나무가 서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요즘, 짙은 갈색으로 동글동글하고 에나멜을 칠한 듯 반질거리는 열매가 그 아래 탐스럽게 떨어져 있다. 하지만 오늘은 빈 밤송이 껍질만 길 위에 뒹굴고 있을 뿐이다. 나보다 먼저 일어난 마을 주민이 앞서 다녀갔었나 보다. 그래도 몇 개는 주울 수 있다. 이렇게 며칠을 모아 삶아 먹으니 어쩌면 이리도 고소하고 맛있는지. 자연이 주는 수확물을 대가 없이 모으는 행위가 편안하면서도 쏠쏠한 행복감을 안겨준다. 수확기가 다가온 먹거리 장소를 기억해두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수렵 채집하던 구석기 시절 조상들의 축적된 경험치를 내 몸 어딘가에서 이처럼 소환해 내고 있는 것이다.


농사의 힘겨움 없이 수확하고 채집하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직장 다니지 않고 돈벌이 걱정 없이 한가로이 쉬엄쉬엄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일본에서 소바, 홍콩에서 딤섬을 이태리에서 파스타, 멕시코에서는 타코를 먹으며 떠도는 순례의 삶을 살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몽상 너머 어딘가에서 대답이 들려온다. ‘꾸지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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