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명절에 여동생이 조카와 함께 오랜만에 우리 집을 찾았다. 살이 너무 빠져 뼈만 앙상하다 싶을 정도로 야위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통통하다 싶을 만큼 살집이 있었는데 대학 이후부터는 홀쭉해지기 시작하더니 다시는 이전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최근 개인적인 아픔이 있고부터는 뼈에 가죽이 붙었다고 할 만큼 살이 빠졌다. 그래서 더 불편했다.
낮이 점점 짧아져 6시가 넘으니 제법 어둑해졌다. 파티 라이트를 켜니 따스한 불빛이 줄지어 빛나며 주변을 밝게 비추었다. 아침에 깎아서 향긋한 풀향기가 나는 초록빛 잔디밭에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흰색 테이블보도 덮었다. 야외 아궁이에 걸린 솥에 닭을 넣고 1시간여 푹 삶아내고 있었다. 지난겨울 가지치기한 나무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잘도 탔다. 옆에서 지켜보던 여동생이 나랑 자리를 바꿔 아궁이 앞에 앉아서 불꽃을 향해 나무를 던졌다. “어릴 적 시골에서 맡아보던 냄새가 난다.” 여동생은 연기를 맡으며 일렁이는 불빛에 환해지는 얼굴을 한 채 잠시 추억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여동생은 어릴 적에 고집이 세고 남자아이처럼 씩씩했다. 내가 예닐곱 살 무렵 우리 가족은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여동생이 주인집 아이와 싸우다가 빈 깡통을 힘껏 차 버렸다. 날아간 깡통이 하필 그 아이의 이마에 맞았다. 날이 서 있던 깡통 뚜껑 부분이 피부를 찢어놓는 바람에 새빨간 피가 얼굴 위로 줄줄 흘렀다. 주인집 아이는 자지러졌다. 어른들이 달려 나와 지혈을 하고 병원으로 즉시 달려갔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흉터는 남았을 것이다. 이후 우리 가족은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또 한 번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여동생은 4학년이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아마도 공부 문제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요구한 기대를 우리가 많이 져버렸던 것 같다. 노한 아버지는 회초리로 때리는 대신 다 필요 없으니 집을 나가라고 소리치셨다. 내가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 여동생은 씩씩하게 대문을 나섰다. 아버지는 너도 나가라며 앉아 있던 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는 수 없이 우리 둘은 대문 밖에 서 있었다. 집 밖으로 쫓겨난 것은 처음이라 많이 당황스러웠고 미래에 대한 막막함으로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린 마음에 “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옷도 한 벌뿐이고 잠은 어디서 자지? 누가 먹여줄 것인가.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험한 세상에 내동댕이 쳐지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할머니가 조용히 따라 나오시더니 밖에 조금만 서 있다가 아버지 화가 풀리면 들어와서 용서를 빌라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셨다. 골목에 둘이 우두커니 서 있자니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 보기가 부끄러웠다.
그때였다. 여동생이 말없이 뚜벅뚜벅 걸어서 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아니 쟤가 어딜 가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정말로 집을 나가려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저러다가 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서 노숙하는 거지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벌컥 들었다. 나는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뒤를 따라나섰다. 여동생은 묵묵히 빠르게 계속 걸었다.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지나 낯선 동네를 지나고 큰 도로와 하천도 건넜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고 말을 붙여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서너 시간을 그렇게 걷고 나자 다행스럽게도 여동생은 다시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골목을 지나 우리 집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서성이던 할머니와 고모가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어딜 겁도 없이 나갔냐고 야단이었다. 할머니와 고모는 빨리 들어가서 아버지께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싹싹 빌라 하셨다. 두려움과 반항심이 뒤섞인 감정으로 대문을 들어서서 안방으로 향했다. 우리는 아버지의 불호령과 한바탕 혼꾸녕을 예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외려 웃고 계셨다. 아니 어이없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히려 그게 더 무섭게 다가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 말씀드렸다. 여동생은 내 옆에 말없이 그냥 앉아만 있었다. 침묵이 흐르고 아버지는 호통도 회초리도 따귀도 없이 둘 다 방으로 돌아가라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 이후 아버지로부터 크게 야단을 맞았던 기억은 없다.
가족 구성원으로 자라난다는 것은 사회화의 과정을 겪는 일이고 그러한 시간을 통해 서로에게 기쁨과 즐거움 또는 고통의 원인이나 결과가 되기도 한다. 내가 드러내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기억보다는 숨기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은 상처와 후회를 가족들은 더 잘 기억한다. 그래서 어릴 적 기억들로 인해 잘 안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또는 가깝다는 이유로 쉽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아픔을 받기도 하는 것이 가족인 것 같다.
아무 관계도 없고 얽힐 일도 없을 때는 다들 좋은 사람들이다. 관념상으로는 모든 인류가 '손에 손 잡고' '위 아 더 월드'를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이해와 이익 그리고 돈과 권력이 관련될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인종과 종교, 민족과 국가, 지역과 집단, 그리고 너와 나로 갈라지게 되어 있다. 집단이나 타인의 잘못과 단점이 먼저 드러나 보이게 마련이고 더 커 보이기 시작한다. 묵은 감정들은 풀리기보다는 점차 꼬이고 갈등은 해소되기보다 커지기 마련이다. 서로 떨어져 연애할 때는 잘 몰랐던 것들이 결혼하여 한 집에서 부대끼다 보면 파국으로 치닫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해관계가 크게 없는 사람들에게는 나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미소 짓고 서로 예를 갖춰 평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가까운 가족에게는 함부로 행동하기도 하는 것이다. 잘 아니까, 가족이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하면서. 사실 나도 그러했었다.
여동생을 닮은 듯 안 닮은 조카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힘든 시간을 이겨낸 여윈 여동생을 바라보니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도 어머니의 모습도 그리고 할머니의 모습도 보이는 듯했다. 그때였다. 전생이라는 것이 생뚱맞게 어디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몸속에 켜켜이 쌓여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조카의 몸속에는 그녀의 엄마인 내 여동생은 물론이고 돌아가신 가족들과, 조선시대와 삼국시대를 지나 원시 몽골지역의 벌판을 달리던 조상의 흔적도 있을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 최초의 어머니 ‘루시’를 거쳐 유인원, 설치류, 파충류, 물고기, 박테리아와 만나고 드디어 마지막에는 지금 여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우주 그 자체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30억 년 이상의 역사 아니 그 이상 셀 수도 없고 가늠할 수도 없는 무한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그 자체로 그냥 우주가 아니겠는가.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조정석의 아들 ‘우주’만 우주가 아니라 조카도 우주고 여동생도 우주고 우리 모두가 우주인 것이다. 이런 생각에 빠져 있으니 여동생이 한마디 했다.
“오빠 많이 늙었네. 술 좀 줄이고 건강도 좀 챙겨”
“술맛 떨어진다. 삼계탕 국물이나 더 먹어” 시원하게 우려진 닭 육수 한 국자를 가득 떠서 담아주며 내가 대답했다.
동학에 대해서는 학창 시절 시험 칠 때 외운 ‘인내천’ 사상 외에 달리 아는 건 없지만 또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이 있다. 19세기 말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이 제자들에게 말했다고 하는 ‘향아설위'(向我設位)이다. 그 말의 뜻은 '제사하는 사람에게 제사상을 차리라'는 것이다. 내가 조상에게서 생명의 바통을 이어받았으니 내 안에 조상이 있는데 바깥 어디에다 대고 절을 할 것이냐는 것이다. 즉, 조상에게 절하려면 제사상을 돌려서 나에게 절하라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가족이 보고 싶고 그리울 때는 자책하고 후회하고 슬퍼하고 원망하지 말자. 나를 바라보며 용서하고 화해하며 그리고 나를 더 사랑하자. 그것이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이 될 테니까.
식사를 마치자 어둠이 깊어졌다. 떠나는 여동생의 뒷모습에서 씩씩하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늙어가던 부모님의 모습과 할머니의 걸음걸이가 내비치고 있었다. 마을 풀숲에서는 연신 가을을 재촉하는 풀벌레가 울어댔고 이웃집 개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멀리 짖었다.
나무는 제 가지가 부러지면 상처를 신속히 에워싸서 치유하는데 세월이 지나면 그것은 옹이가 된다. 목재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이다. 나무는 상처를 기억하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내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나쁜 기억도 아픈 상처도 나무의 옹이처럼 더욱 단단한 내면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조심히 잘 가라 우주야”
점점 사라져 가는 차량 후미등의 붉은빛을 향해 손을 흔들며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