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군 복무 시절이다. 제대 후 공통적인 경험이 있는데 다시 입대하는 악몽을 꾼다는 것이다. 탁 트인 내무반. 사생활이라고는 화장실 안에서만 가능하고 수컷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니 마찰이나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 제대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슬프고도 생생하다. 내 머릿속에만 남아 있을 뿐인 눈부시게 푸르던 내 인생의 일부분이다.
일병 때였다. 걸레를 빨고 있는데 갑자기 내무반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급히 달려가 보니 김 병장 밑으로 모두 집합해 있었다. 내무반 가운데 복도에 계급 순으로 주르륵 섰다. 김 병장은 왼쪽 침상 위에 서 있었다. “느릿느릿 모이고 이것들이 요즘 나사가 빠졌어.”라고 말하며 불만 사항 몇 가지를 언급했다. 그리고는 한 명씩 발로 가슴팍을 찼다. 맞은 졸병들은 반대편 뒤 침상으로 나자빠졌다가 관등성명을 대며 다시 벌떡 일어섰다. ‘퍽’ “상병 최근식”, ‘퍽’ “일병 박종혁”... 내 차례가 왔다. ‘퍽’ 가슴팍을 맞은 나는 뒤로 벌렁 넘어졌고 침상에 등을 쿵 부딪혔다. 그러자 운동복 윗주머니 양쪽에 가득 넣어두었던 건빵들이 침상에 와르르 쏟아졌다. 병장을 포함해서 같이 얼차려를 받던 졸병들 모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킥킥거리고 일부는 표정을 감추느라 고개를 숙였다. 당시에는 왜 그렇게 배가 고프던지. 건빵과 별사탕은 심심풀이 간식이 아니라 힘든 시간을 견디게 하는 위로이자 심하게 얘기하면 생존 조건이었다. 그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폭행을 동반한 얼차려가 있었고 맞지 않고 잠자리에 들면 오히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 시절 병영문화가 그러했다.
어느 날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새벽 근무조여서 아직 일어날 시간은 아니었지만 부대원 일부가 소총과 탄약을 급히 챙기는 소리에 그만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진돗개 둘’ 경보가 발령되었다고 했다. 여기저기 사이렌이 울리고 근무조를 제외한 나머지 부대원들이 한밤중에 플래시를 비추며 급히 달려 나갔다.
다음날 아침 내가 경계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에 돌아와서 아침을 먹고 있을 때 금방 잠이 깨서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 고참이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4소대 이석호 니 동기 아니냐? 그 자식이 어제 탈영하는 바람에 비상이 걸렸던 거야.”
석호는 훈련소에서 자대로 향하는 버스에서 처음 만났다. 누나만 5명인 집안에 막내였다고 했다. 아들을 낳고자 하는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 때문에 그는 세상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키는 작은 편이었는데 붙임성이 좋고 말이 좀 많았다. 꿈이 유명 호텔의 주방장이 되는 것이라 했다. 아르바이트로 식당에서 일하다가 입대했는데 틈틈이 공부해서 꼭 꿈을 이룰 것이라 했다. 애인도 있다 했다. 다음에 휴가 같이 가면 자기 애인 친구도 불러서 소개를 시켜준다고 했다. 나는 녀석이 다른 말을 할까 봐 새끼손가락부터 가만히 걸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그는 훈련소 있을 때 가수 장덕이 죽었다는 소식을 영내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던 중에 들었다고 했다. 뜬금없이 하얀 이발포에 툭툭 눈물이 떨어져 민망했다고 했다. 우리는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이승철의 ‘마지막 콘서트’,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를 읊조리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부대 정문에 도착했었다. 왜 그때 우리가 알던 노래들은 모두 이별을 말하고 마지막을 얘기했던 것인지...
신고 후 나는 중대에 남았고 석호는 4소대로 배치되었다. 휴일이면 한 번씩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그는 짐을 싸서 4소대로 향하는 쓰리쿼터 트럭에 다시 올랐다. 이후 행사나 교육이 있을 때만 잠깐씩 얼굴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는데 표정은 예전 같지 않게 굳어 있었고 그늘이 져 있었다.
수색조에 참여했던 고참이 말을 이었다. “어제 재수 없이 차출되는 바람에 그 자식이 마지막 근무하던 초소에 갔었지. 벽이 온통 피칠갑이더구먼. 나중에 알고 보니 대검으로 손목을 그었다 하더라고. 다행히 총은 그대로 있었어. 핏자국을 따라 군견반 셰퍼드가 쫓았고 우리도 뒤를 따랐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내 창고 한구석에서 녀석을 찾았어. 노랫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들리는 곳으로 플래시를 비추니까 피를 흘리며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더라고. 그런데 울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얼마 전에 죽은 가수 장덕 있잖아.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그걸 느릿느릿 흐느끼면서 부르고 있더라고.”
석호는 군재판에 넘겨졌고 한동안 영창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후 다른 소대로 재배치 받았다. 어느 맑은 휴일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러 갔다. 살도 찌고 표정도 한결 밝아 보였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소매 아래 언듯 보이는 대검으로 그은 자국은 아물었지만 흉터는 남아 있었다. 그는 머리를 숙여 정수리를 보여주었다. 머리카락이 없는 흉터 몇 군데가 남아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전에는 물집과 부스럼으로 엉망이었지.” 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석호가 처음 배치받았을 때 4소대에는 모두 병장만 있었다. 후임병이 없어 막내 병장이 내무반 청소며 궂은일을 혼자 도맡아 해오고 있었다. 신병이 충원되었으니 얼마나 귀엽고 반가웠겠는가. 하지만 막내 병장은 혹독했다. 조금만 맘에 안 들어도 주먹과 몽둥이가 날아들었고 얼차려가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제일 악랄했던 건 치약 뚜껑에 원산폭격을 시키는 것이었다. 부들부들 떨려서 쓰러질 때까지 시켰다고 했다. 정수리가 차라리 구멍이 나기를 바랐다고 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내무반을 벗어나 초소에서 근무하는 시간이 차라리 좋았다고 했다. 그날도 초소에서 혼자 근무하다가 몇 시간 뒤면 다시 내무반에 돌아가야 한다는 공포가 이성을 잃게 했던 것이었다. 혼자 오롯이 받아내야 했던 고초가 그를 더욱 힘들게 했을 것이었다. 당시에도 군대 내 체벌을 감시하고 예방하기 위한 노력은 있었지만 근절되기에는 악습의 고리가 너무나 견고했다.
사연을 듣고 있던 나는 목이 메어 그의 등을 말없이 두드려주기만 했다. 석호는 괜찮다는 듯 빙그레 웃어 보였지만 그가 받은 내상은 쉬 가시지 않을 것이란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곧 아물게 되겠지만 두뇌 깊숙이 각인된 상처의 기억은 질기도록 오래 남아서 불쑥불쑥 그를 괴롭히게 될 것이었다.
살아가다 보면 그런 사람을 간혹 만나게 된다. 지위와 관계를 이용하여 아주 집요하고 악랄하게 괴롭히면서 무시하는 사람들 말이다. 직장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면 생지옥이 다름없다. 어렵게 조직에 들어와서 먹고살아야 하는 처지인지라 참고 견디지만 그의 괴롭힘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났을 때 받는 상처와 스트레스들은 속으로 곪아서 차곡차곡 쌓이게 되고 결국 병을 얻든지 아니면 사표를 쓰든지 하게 된다. 사표를 쓰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사유는 직장 혹은 임금 등의 조건이 아니라 상사 때문이라는 통계가 있다고도 한다. 상사 본인도 어쩌면 그렇게 당하고 배워 잘못된 직장문화를 답습하게 된 또 다른 희생자일지도 모르지만 조직 내에서 폐습을 이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성격이나 콤플렉스 혹은 숨겨진 못된 습성이 주요 원인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요 아버지이기도 하고 또 상사들에게는 곧잘 유능하다고 평가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게다가 여타 동료들에게는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속 모르는 사람들의 “그 사람 좋은데 부하가 뭔가 잘못이 있겠지” 같은 얘기들을 들을 때면 피해자는 더욱 억장이 무너지기도 한다. 설혹 부하 직원에게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비인간적인 괴롭힘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다들 참 철딱서니가 없다. 자신이 알든 모르든.
내가 상병 무렵이었다. 선임 상사 주재로 회의가 있다고 했다. 모두 식당에 모였다. 상사가 말했다. 5소대에 티오가 한 명 생겼는데 희망자가 있느냐는 것이다. 중대 생활은 층층시하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리고 나는 소대가 훨씬 편하다는 얘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내가 먼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내 바로 위 고참도 손을 드는 것이었다. 상사가 우리 둘을 불러 등을 대게 했다. 그리고 가위바위보를 시켰다. 상사가 가위바위보를 외치자 주위 병사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내가 바위, 고참이 가위를 내고 있었다. 나는 다음날 짐을 챙겼다. 쓰리쿼터 트럭을 타고 5소대로 향했다.
단기병들을 관리하는 분대장을 맡았다. 초소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중대에서는 상병이라 아직 졸병을 면치 못했었지만 5소대에서는 관리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때 나의 선택이 너무나 탁월했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끝없이 펼쳐진 철책선과 푸른 초원. 봄부터 가을까지 끊임없는 제초작업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생활이었다. 괴롭힘도 없었고 얼차려도 없었다. 당시 소대장은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임관해서 중위로 있었는데 자그마한 체구에 안경 너머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바둑을 잘 두어서 아마추어 2단쯤 된다 했다. 바둑을 둘 때면 연신 줄담배를 피워댔다. 이십 대 후반이었음에도 벌써 정수리가 훤했다. 바둑 초보인 내가 새카맣게 미리 돌을 깔고 두었지만 결국 지고 말았다. 그는 별다른 간섭을 하거나 분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우리 소대는 적당한 폭력과 질서를 유지하며 조용히 제 갈길을 가고 있었다. 제대하고 오랜 시간 후에 그를 우연히 만났는데 지방 도시에서 변호사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새벽 상하번 시간이었다. 상번자들을 태우고 초소를 돌기 위해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운전병이 갑자기 육공트럭을 세웠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고라니 가족 세 마리가 도로 한가운데 우뚝 멈춰서 있었다. 고라니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우뚝 서 있기만 했다. 나는 운전병에게 그대로 있으라 하고는 차문을 열고 조용히 내려섰다. 고라니들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약 2미터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갔다. 넘어지면서 손을 뻗으면 녀석들의 다리 한쪽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평소 팔짝이며 세상을 자유롭게 다니던 고라니들이 바로 내 눈앞에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불빛에 갇혀 서 있었다. 냉장고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 겨울 날씨 속에서 나와 고라니 가족은 하얀 김을 뿜어내며 스포트라이트 불빛이 비추는 무대 한가운데에서 세상이 멈춘 것처럼 우두커니 멈춰 서 있었다. 불빛 바깥은 천리만리 어둠이었다. 어린 고라니 한 마리에게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헤드라이트 불빛에 잠시 맹안이 되었던 녀석은 낌새를 챘는지 훌쩍 뛰어올라 저만치 먼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머지 가족들도 뒤를 따랐다. 내 창백한 빈손을 육공트럭의 불빛만이 밝게 비추고 있었다.
청춘의 꿈과 희망은 안갯속의 고라니처럼 그렇게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가도 잡으려 하면 저만치 달아나던 시절이었다. 안개비 내리는 거리에서도 눈부신 햇살 속에서도 아련한 그리움이 사무치던 시절이었다. 몰라서 순수했지만 그래서 불안했고 눈 내리는 하늘처럼 끝없이 막막했다.
피를 흘리며 장덕의 노래를 부르던 내 동기는 지금 어느 호텔 주방에서 프라이팬을 잡고 있을 것이고 내 가슴팍을 발로 뻥 차 버렸던 고참도 어디쯤에서 가족들과 오손도손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 흩어진 건빵을 주워 먹던 나도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들은 다만 철 모르고 한 일들이었다. 내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주었던 상처는 모두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느덧 색이 바래져 버렸다. 이 가을 물들어가는 저 나뭇잎처럼 곧 떨어져 사라지기 전에 참회하고 용서하자. 삶의 전우들이여 평안히 잘들 지내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