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정(情)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by 힉엣눙크

지난 여름 그와 같이 차를 타고 갈 일이 생겼다. 거리는 어둠이 내렸고 건물들은 하나 둘 불을 밝혔다. 아침부터 내리는 장대비는 마치 오래 참았던 오줌처럼 끝도 없이 도시를 적시고 있었다. 와이퍼만 바쁘게 움직이는 차 안에는 한동안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내가 먼저 말을 건넸고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의 어머니와 내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부모님이 결혼을 일찍 하셨구나.” 이십 대 초반 이른 나이에 그것도 학교를 다니던 중 결혼했다는 사실에 봄 햇살을 받아 벚꽃잎처럼 밝고 싱그러웠을 커플이 떠올랐다.


“네, 그렇습니다.”


“두 분은 아마도 첫사랑이었을 것 같네. 지금도 사이가 좋으시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사이가 나쁘시냐?”


“그것도 아닙니다.”


나는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에 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가족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얘기로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 했다.


“젊은 시절에는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사랑이 주는 설렘과 그리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잖아. 세월이 지나면 모두 정으로 사는 거지. 너희 부모님도 마찬가지겠지.”


“정으로 산다고요? 정이 뭡니까?”


“초코파이다”


그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달리는 도로에서 장애물이 발생했을 때 우회하지 않고 그냥 멈춰버리는 차량 같았다. 일반인이라면 손쉽게 핸들을 돌려서 다시 달릴 것이었지만 그는 뒤에서 차들이 빵빵거려도 진땀을 흘리며 꼼짝 못 하는 ‘세 시간째 직진 중’인 운전자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시마 유키오를 얘기하던 그가 ‘그것도 모르면 간첩’이라는 나의 말에 ‘간첩’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진지하게 묻기도 하는 것이었다.


관심을 가지는 분야만 깊이 파고들 뿐 이외의 것들에는 너무도 무지했다. 서른이 넘었지만 자아의식이 명확하지 않았고 자존심도 거의 없었다. 쓸데없는데 감정을 소모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처받을 일도 그리 없는 듯했다. 세상 누구보다 속 편한 그가 어떤 때는 부럽기도 했다.

최근 뉴스에 스페인 다국적 기업이 세계 최초로 문어 양식을 추진한다고 하자 국제 동물복지단체들이 반대하고 나섰단다. 이유는 문어란 동물이 매우 영리하기 때문에 인지 자극이 없는 양식 탱크에서는 스트레스가 너무 클 것이므로 양식 행위 자체가 동물학대라는 것이다. 또한 영국 정부에서는 문어, 가재 등도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동물복지법에 따라 보호받아야 할 대상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문어의 수명은 3 ~ 5년인데 놀랍게도 복잡한 뇌구조를 가져서 개 수준의 뛰어난 지각 능력과 감정을 가진다고 하는 것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고 한다. 지형지물에 따라 제 몸 색깔을 바꿀 뿐만 아니라 형태까지도 모사한다고 한다. 사람을 구별하고 장난도 치며 사람처럼 다양한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My Octopus Teacher)’은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분야 대상을 받았는데 문어의 영민함과 사람과의 교감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물을 쏟게 만든다고 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다만 편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는 제 속도 모르면서 마치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세상 물정 모른다고 면박을 주면 ‘내가 왜 몰라. 알 건 다 알아!’하고 되받는 아이처럼, 캄캄한 어둠 속 깊은 바다 밑에서 여덟 개의 다리로 더듬거리며 그곳이 세상 전부인 양 살아가는 문어처럼 그렇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에 잠겨서 마치 심해처럼 변해버린 도시를 차를 몰고 달려 목적지에 다다를 무렵 나는 그가 과연 짝을 만나서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마 친구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친구는 있니”


“네 한 명 있습니다.”


“그 친구는 뭐 하는데?”


“000 회사에 다닙니다.”


“자주 만나?”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납니다.”


“어... 자주 만나는구나.” 나는 무심히 대답하면서 사거리에서 좌회전 깜빡이를 넣었다. 그때 그가 조용히 말했다.


“그 친구도 외롭거든요.”


목적지에 다다랐고 작별인사를 했다. 물에 잠긴 도시, 캄캄한 어둠 속으로 그가 문어처럼 천천히 사라져 갔다. 나는 빗속에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