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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by 힉엣눙크

지금은 겨울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 모닥불처럼 따뜻하고 동백꽃처럼 붉은 당신의 마음을 생각합니다.


다시 이별이네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치러내야 할 일들 중 하나이겠지요. 인사발령으로 이제 떠나야 할 시간입니다. 그동안 함께했던 시간들과 기억들이 오래된 사진처럼 스쳐 지나가네요.


하얀 첫눈을 아무런 걱정 없이 밟고 싶다던 당신의 말이 생각납니다. 커피잔을 손에 쥔 채 유리창 너머 낭만 감성으로만 바라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누군가는 짊어져야 할 멍에인 것을요. 슬퍼하진 마세요. 그렇다고 자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이지도 마세요. 울음이 나오면 어디 조용한 곳에서 실컷 울고 오세요. 화가 나면 구석진 곳에서 힘껏 욕설을 퍼붓고 오세요.


그래요 여기는 우리의 삶의 터전 직장이니까요. 고객들은 잠시도 기다려 주지 않고 다그치기 바쁘지요.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니까요. 조금만 틀어져도 노여움을 숨기지 않죠. 우리는 그들의 을인 것을요. 언제부터였을까요. 그리고 언제까지일까요. 세상이 세상을 압착기에 넣고 마지막 한 방울의 기름까지 짜내는 이런 상황을 말이죠.


그런 세상 속에서 유일한 탈출구가 낯선 세상 속으로 떠나는 여행이었던 당신. 출구를 막혀버린 당신의 마음이 어떠할지... 그 막막한 심정은 그저 어처구니를 잃어버린 맷돌 같은 것이겠지요.


우리가 아직 파릇하던 그때 말입니다. 희망과 절망이 시소를 타던 그때 그 시절 말이에요. 나와 당신의 감성을 어루만지던 그 가수가 엊그제 유튜브에서 반백이 되어 나타나 우리가 따라 부르던 그 옛 노래를 부르던 모습에 그저 넋을 놓고 울음 짓던 당신. 나의 젊음, 꿈, 야망 그리고 희망이 형해화되었다고 속절없이 타는 가슴속 촛농이 눈물로 떨어지던 그대여. 그 슬프고 쓰디쓴 영혼은 지금 어느 거리를 배회하고 있나요.


삶의 수레는 빠르게 돌아가고 나는 그 쳇바퀴 속에서 정신없이 뜀박질하기 바쁩니다. 의무 때문이지요. 또 욕심 때문이겠지요. 아니 내가 살아있기 때문일 겁니다. 또 행복하고 싶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나는 왜 행복을 저당 잡히고 유보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못난 당신처럼 말이지요.


어느덧 새해가 또 밝았네요. 밀레니엄을 맞이하느라 첫새벽 캄캄한 밤중에 일출을 보려고 설레는 맘으로 길을 나서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2000년의 새해 일출을 보았지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졌을까요. 22년이 지난 올해도 작심삼일을 반복하며 나약함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꼭 무언가를 갈구하고 성취하기 위해 또 결심해야만 할까요. 그래야 행복해지나요.


당신을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납니다. 매미소리를 들으며 사무실 문을 열고 인사를 나눴던 그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함께하며 정이 들었는데 막상 떠나게 되니 아쉬운 마음입니다. 또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떠나야 할 기차가 불쑥 찾아와 버렸네요.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는 데다 같이 식사할 기회도 변변히 없어서 마스크가 얼굴처럼 각인되어 간혹 당신의 맨얼굴을 마주할 때면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코로나가 끝나고서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마스크를 써야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이병헌과 김태리가 서로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서야 정체를 확인하는 장면처럼 말이죠.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서글픈 일들 중 하나인 것 같네요.


‘인간은 상처를 주기 위해 태어난다’라는 그리스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사회생활을 해야만 하고 그러다 보면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는 얘기겠죠. 나의 허물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지혜로운 농부가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듯 좋은 추억은 걸러서 오래 기억해 주고, 나쁜 기억은 미련 없이 버려 주세요.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할게요.


당신을 사랑하며 미워하고 그리워하는 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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