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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붕어 실종사건의 전말

by 힉엣눙크


"금붕어 없는데요?" 후배가 말했다.


지난주 한 무리의 손님들이 우리 정원을 방문했다. 주남저수지에 일을 보러 온 직장 동료들이 근처에 위치한 우리 집에 잠깐 들른 것이다. 한창 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는 모습에 모두들 즐거워했다. 꽃과 나무의 이름을 묻는 질문들이 이어졌고 나는 이곳저곳을 소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후배는 연못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한결 맑아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 좋은 곳이었다. 내가 금붕어도 살펴보라고 얘기하자 후배가 그처럼 대답했고 내가 다시 잘 살펴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후배는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금붕어가 어디 있는데요?”


직경 1.5미터 크기에 깊이 50센티 정도 연못에서 손바닥만큼 크고 붉은 금붕어들을 못 찾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나는 한심하다는 듯 “어디 그늘 쪽에 숨었겠지.”라고 말하며 연못으로 다가가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금붕어가 보이지 않았다. 금붕어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3년 전부터 줄곧 잘 살아있던 금붕어가 오늘 갑자기 없어지다니. 그것도 손님들이 찾아온 날에 딱 맞춰서 말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한 모금 빨아 당기면 싸르륵 소리와 함께 빨갛게 타들어 가는 담배처럼 마음속 일부가 하얗게 변해가는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이 아연해서 멍하니 빈 연못을 바라보았다.


“고양이가 생선 좋아하잖아요. 잡아먹었을 수도 있지 뭐.” 당황해하는 내 모습을 보던 후배가 측은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가 모두 사라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마침 아내가 외출 중이라 나중에 귀가해서 금붕어는 다른 데 옮겨 놓았다고 얘기해 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면서 누군가의 부름에 자리를 옮겼다.

저녁 무렵 장모님 댁에 다녀온 아내가 울상이 되어 내게 말했다. “금붕어가 사라졌어!”


아내가 그날 아침 금붕어 밥을 주기 위해 연못가에 가서 ‘금붕 금붕 밥 먹자~’하고 먹이를 주려는데 여느 날 같았으면 수면 위로 몰려들던 녀석들이 웬일인지 한 놈도 보이지 않더라고 했다. 당황한 아내가 할 말을 잃고 연못 안을 유심히 살펴보니 유일하게 남은 검은색 한 놈만 바닥에 착 붙어서 꼼짝도 안 하고 있더란다. 내가 낮에 후배와 함께 검은색 금붕어를 못 본건 녀석이 그늘 쪽에 숨어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다섯 마리 중 검은색 한 마리만 남고 네 마리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전날 오후까지 금붕어가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밤과 새벽 사이에 뭔가가 금붕어를 잡아갔다는 말이 된다. 나는 용의 선상에 세 놈을 올렸다. 사람이 가져갔을 리는 없었다. 도대체 금붕어를 잡아다가 뭘 하겠는가? 매운탕이라도 끓여 먹자고 남의 집 연못에서 낚시라도 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기 때문에 사람은 아예 제외했다.


첫 번째 용의자는 고양이였다. 우리 정원에 종종 나타나서 배회하던 녀석인데 그놈이 나타나면 은달이는 쫓아다니며 광분을 하곤 했다. 하지만 지난 3년간 금붕어를 유심히 지켜보기만 하다가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며 잡아먹었단 말인가. 게다가 금붕어는 덩치가 커서 녀석이 만만하게 상대할 먹잇감이 아니었다. 두 번째 용의자는 가마우지였다. 주남저수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물고기 사냥꾼으로 유명한 녀석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어부들이 녀석의 목을 끈으로 묶어서 배를 타고 물고기 사냥을 나가는 것을 텔레비전으로 본 적이 있었다. 가마우지가 물속에 들어가서 큼직한 물고기를 주둥이로 물어서 나오는데 삼켜도 목으로 넘길 수 없었다. 목 아랫부분이 끈으로 묶여 있어서 물고기를 삼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부는 삼키지 못하고 불룩한 가마우지의 목을 눌러서 물고기를 토하게 했다. 그렇게 잡은 물고기가 뱃전에 한가득이었다. 가마우지라면 우리 연못에 있는 금붕어 몇 마리쯤이야 아마도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세 번째 용의자는 왜가리였다. 내가 그날 출근 전 새벽 운동을 하러 마당에 나섰을 때 지붕 위로 왜가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었다. 하늘에서 왜가리 날아다니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 집 지붕 위로 낮게 나는 모습은 생경해서 기억에 남았었다.


집에는 방범용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연못은 비추지 않았다. 사각지대였던 것이다. 금붕어 때문에 연못 근처에 새로 카메라를 설치하기도 우습고 그렇다고 애써 키운 금붕어 녀석들을 잃어버리니 분한 마음도 들고. 뭔가 수를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하루였다.


다음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뭇잎 사이로 얼핏 연못에서 무언가 큰 물체의 움직임이 스쳤다. 굼실거리는 게 사람처럼 덩치가 컸다. 물고기를 잡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쫓아가 보니 왜가리였다. 낌새를 챘는지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큼지막한 날개를 펴고 훅하고 날아올랐다. 생각보다 덩치가 컸다. 흥분한 나의 눈에는 익룡처럼 거대하게 보였다. 녀석은 유유히 하늘로 날아올라 저 멀리 사라져 갔다. 연못가 바닥에는 검은색 금붕어가 널브러져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몸통 여기저기 상처를 입어서 비늘이 하얗게 벗겨져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매운탕이나 민물회 재료로나 여겨질 것이었지만 연못가에 앉아 가만히 그들의 유영을 살펴보곤 하며 위로를 받던 우리들에게 그들은 반려동물이었다. 다섯 마리 각각의 녀석들을 크기나 색깔의 특성으로 구분할 수 있었고 특히 아내는 매일 녀석들을 챙겨 먹였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이 더욱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검은색 금붕어를 묻어주려고 삽으로 건드리자 풀쩍하고 뛰어올랐다. 다행히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급히 녀석을 다시 연못에 넣어주자 헤엄을 치며 물아래로 내려갔다. 왜가리에게 잡아먹히려던 찰나에 내가 구해주었던 것이다. 정말 운 좋은 녀석이다. 동료 금붕어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왜가리 입 속으로 사라졌지만 보호색으로 용케 살아남았다가 그 다음날 또 한 번 잡아 먹히려는 찰나 기적처럼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나는 마트에 가서 작은 금붕어 열 마리를 사서 연못에 넣어 주었다. 검은색 금붕어가 외롭지 않도록. 그리고 연못 위에 그물을 쳤다. 고기 맛을 본 왜가리가 다시 찾아올 것은 불을 보듯 뻔했으므로 미리 방도를 해야만 했다. 왜가리의 머릿속에서 우리 연못이 잊힐 때까지는 그물을 덮어 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바라보는 자연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곳은 엄연히 먹고 먹히는 사슬이 존재하는 치열한 생존 현장이다. 자연을 모방해서 가꾸는 우리의 정원에는 온갖 동물들 그리고 식물들이 날아온다.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어떤 때는 성가시고 골칫거리이기도 하다. 풀씨가 날아와서는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하는 바람에 뽑아내느라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두더지가 온 정원의 꽃과 나무들을 들쑤셔서 시들하게 만들 때는 화가 나고 해결방법을 찾기 어려워 곤혹스럽기도 하다. 뱀이나 두꺼비의 출몰 그리고 물까치의 산란기 히스테리에 소스라치기도 한다. 특히 이번 금붕어 사건을 통해 불쑥 끼어든 자연의 법칙이 낭만적 감성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에 죽비를 내리친 것이다.


함께하거나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자연은, 깨끗하지만 더럽고, 착하지만 사악하고, 추하지만 아름답다는 이율배반을 여지없이 느끼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나의 몸뚱이도 그와 같기 때문일 것이다. 멀찌감치 풍경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커다란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자연과는 확연히 다르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 같다. 유럽 등 외국을 방문하면 천국처럼 아름답다. 그들의 자연, 건축물, 문화 그리고 사람들. 시계 톱니처럼 돌아가는 삶의 현장들이 여행객들의 눈에는 이국적이면서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도 사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사회도 각종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고 구성원들은 직장에서나 가정에서 삶의 애환을 겪어내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곳의 생활이 지겹고 힘들어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 나라의 누군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답지만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개체들은 고통스럽다. 냉혹한 생존의 법칙이 인간 세계에서도 여지없이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사계’의 작곡가 비발디가 만든 노래(모테트)가 있다. 바로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숙명을 노래로 아름답게 표현했는데 제목은 한 번만 들어도 잘 안 잊힌다.


‘벌과 고통 속에

만조하며 살아가는 영혼

...

세상은 겉모습으로 눈을 속이네

감춰진 상처로 내부에서 부식하네

속임수로 우릴 압도하는 세상...’

<안토니오 비발디 : 모테트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 중 일부>


세상 어디에선가는 잔인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누군가는 고통을 겪고 있으며 나는 또 금붕어를 잃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지금의 일상이 행복임을 깨닫지 못한 채 어제의 기억에 고통스러워하고 다가올 미래에 불안을 느끼면서 살고 있는 오늘 하루가 또 부끄러우면서도 감사하다.


나의 금붕어는 왜가리 뱃속에서 참 평화를 이루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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