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는 정원 한가운데 닻을 내렸다. 역대급 태풍 힌남노가 남부지방을 스치듯 지나간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고서였다. 정원 땅바닥에 긴 쇠막대를 망치로 박았다. 준비한 빨랫줄을 쇠막대에 묶고 나무줄기와 연결했다. 마치 태풍에 피항한 배가 닻을 내린 것처럼.
모든 나무를 묶은 것은 아니었다. 키만 멀대같이 크고 줄기는 가느다란 스카이로켓처럼 쓰러지기 쉬운 나무, 그리고 잎이 많고 가지가 넓어서 바람의 저항으로 부러지거나 넘어질 우려가 있는 꽃사과나무가 그 대상이었다. 2019년 미탁 태풍에 정원수들이 쓰러지고 부러진 경험을 치렀던 터라 크건 작건 태풍이 온다고 하면 이제 나무를 그처럼 고정해야 걱정이 덜어졌다. 애써 키운 나무가 드러누운 모습을 볼 때 느꼈던 안타까움과 상실감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업을 다 끝내고 바라보니 정원이 마치 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넓게 가지와 잎을 펼친 나무는 돛을 활짝 펼친 것 같고 스카이로켓처럼 가늘고 긴 나무는 하늘로 쭉 뻗은 돛대처럼 느껴졌다. 갑판 위에 놓인 화초류들도 쓰러지지 않게 막대와 줄로 지지해 두었다. 이제 우리 정원 힉엣눙크호는 채비를 단단히 마치고 긴장감 속에서 태풍의 한가운데를 막 관통하려는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내와 함께 정원이라는 배를 타고 세월의 바다로 항해를 시작한 지 벌써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작은 나무를 심고 가꾸며 조금씩 넓히고 키워 정원이라는 배를 건조했고 ‘지금 여기’라는 뜻의 라틴어 ‘힉엣눙크(Hic et Nunc)’라고 이름 붙였다.
물이 끊겨 정원의 샘이 마르고 나뭇잎이 타들어 가는 가뭄이라는 ‘암초’를 만나 애를 먹기도 하고 뱀과 두더지라는 ‘해적’을 만나 사투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거센 태풍을 만나 멋진 돛처럼 잘 키운 나무를 부러뜨리는 바람에 크게 수리를 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잡초와 지루하고도 끝없는 씨름을 해야 할 땐 바람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서 제자리만 돌고 있는 돛단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름다운 항구에 도착한 것처럼 화려한 꽃과 나비 그리고 새들이 찾아드는 정원에서 사람들을 만나 반가웠고 인연이 다 한 이와는 이별을 하기도 했다.
매일 보는 정원과 끝없는 노동이 이제 지겹지 않으냐는 얼마 전 누군가의 물음에 나는 정원을 가꾸는 일은 한 곳에 정박해 있는 배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세월이라는 물살을 헤쳐나가는 항해와 같아서 우리의 여행은 언제나 새로운 모험이고 기쁨이고 행복이라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을 말로 설명해본들 결국 제 방식대로 생각할 것이기에 나는 그냥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그날 밤 드디어 태풍의 비바람이 몰아쳤다. 모든 창문을 꼭꼭 닫은 채 서재에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흐으어엉”하고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서 아내에게 “왜 그래? 무슨 일이야.”하고 물었다.
“은달아! 꿈이야~ 꿈.”하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가 심드렁하게 외쳤다.
현관에 누워서 꿈나라에 빠진 은달이가 마치 사람이 내는 것처럼 서럽게 울었던 것이다. 개를 키우면서 알게 되는 새로운 것들 중 하나가 개도 꿈을 꾼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에게 삶이란 태어났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한바탕 꿈일 뿐이다. 꿈속에서 꿈인지 모르고 울부짖는 은달이처럼 우리도 울고 웃으며 아등바등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한때 나는 갤리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였다. 남과 나를 비교하며 알량한 자존심을 부여잡고 노예선에 스스로 올랐다. 하루하루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휘둘리고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오직 이상향을 바라보며 노 젓는 것밖에 모르던 시절이었다. 나는 갤리선이 난파되고 나서야 겨우 내가 노예였음을 어렴풋이 깨달았을 뿐이다.
아내와 정원을 가꾸면서 차츰 노예의 삶에서 주인의 삶이 무엇인지 알아 가고 있다. 폭풍이 몰아치면 뿌리 약한 나무처럼 나는 곧잘 흔들리기도 하지만 이제 겁먹고 자책하고 움츠리기보다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한다.
‘그래, 이건 지나가는 바람이고 꿈이야.’
나는 우리 정원 힉엣눙크호의 핸들을 잡고 있으니 내가 선장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선장은 아내이고 나는 조타수일 뿐이라는 것을. 선장이 ‘좌현 15도!’를 외치면 나는 ‘그건 아니라고 봐’라고 했다가 종래에는 핸들을 돌리고 마는 것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조타수가 주인공인 영화가 지금 상영되고 있고 나는 힉엣눙크호 항해에서 비록 옥신각신 거리지만 평화를 얻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 날 아침 태풍이 지나간 출근길 도로변에 몇몇 넘어진 나무를 볼 수 있었다. 쓰러지거나 부러진 나무는 대개 미루나무처럼 위로 쭉 뻗기만 한 나무가 많았다. 잎이나 가지가 무성한 나무가 바람의 저항을 많이 받아 쉬 넘어질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느 수목 전문가가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나무가 태풍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는 넓게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깊게만 뿌리내리는 나무는 그래서 쓰러지기 쉽다고 했다. 세종 27년 편찬된 용비어천가의 대표 구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므로, 꽃 좋고 열매 많나니’에서 ‘깊다’라는 의미는 아래는 물론이고 옆으로도 멀리 뿌리를 내렸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맞겠다.
오로지 아래로만 내려가지 않고 넓고 촘촘하게 뿌리내린 나무는 이번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흔들리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제 인생에 당당한 주인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