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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탐방을 하다가 등짝을 맞았다.

by 힉엣눙크

‘대기 번호 35’

허기진 배를 안고 찾아간 그 식당 현관의 키오스크 화면이 우리의 미소를 걷어가 버렸다.


내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묻자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말총머리를 한 중년의 사내가 1시간쯤 기다려야 한다고 환자에게 시한부 판정을 전하는 의사처럼 덤덤히 말했다. 시계를 보니 2시 30분. 점심 식사 시간을 일부러 피해서 왔건만 퇴짜를 맞고 말았다. 우리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내에게 외식을 시켜줄 겸 해서 오랜만에 방문한 밀양 재약산. 아직 단풍이 들지는 않았지만 신선한 공기가 오장육부를 시원하게 씻어주는 계곡을 따라 걸어 올랐었다. 계곡 중간쯤 물이 흐르다 소를 이루는 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속세의 허물을 벗어던지듯 양말을 벗고 물에 발을 담갔다. 생각 같아서는 알몸으로 첨벙 뛰어들고 싶었지만 말이다. 자갈길을 올라오며 쌓인 열기와 피로, 그리고 생활의 찌꺼기들이 차가운 계곡물에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고요한 수면. 이름 모를 산새 소리와 상쾌한 바람. 자연이 마치 고이 간직해 온 선물을 내어주는 듯 감동을 주었다.


“몇 시간 차를 달려온 노고가 씻은 듯 날아간다.”

나의 말에 아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산행 후 우리는 배가 고파 하산을 서둘렀다. 나는 SNS를 통해 미리 검색해둔 그 맛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대기자 순번 35번째라니. 1시간이나 기다려서 먹을 만큼 우리의 허기는 여유롭지 않았고 설혹 여유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는 수준 높은 미식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미각의 황홀경을 경험하겠다고 몇 시간이고 자신의 시간을 사용하는 식도락가도 아니었다. 그저 이왕 하는 한 끼 식사, 좋은 기억 하나쯤 더 할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차를 돌려 근처 다른 음식점으로 향했다. 주차 후 식당으로 들어가니 식당 마당에는 사람들이 모이를 기다리는 새처럼, 선지자의 세례를 받으려는 무리처럼 가득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SNS에 유명 맛집으로 검색되지 않는 식당인데도 말이다. 아마도 우리처럼 꿩 대신 닭을 찾아 몰려온 사람들일 것이었다. 복날이 지났건만 밀양에서는 ‘닭’도 귀했다. 날씨가 좋은 주말, 관광객들이 일시에 몰린 탓이리라. 아내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집밥으로 늦은 ‘점저’를 먹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밀양 시내에 가면 여유롭게 식사를 할 수 있을 거라며 아내를 다독였다.


다시 맛집 검색을 해서 시장통에 있는 국밥집을 어렵게 찾아갔다. 하지만 아뿔싸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식당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 아내는 서서히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근처 다른 식당을 찾아갔지만, 그곳도 ‘브레이크 타임’이라는 알림판이 식당 앞에 내걸려 있었다. 아니 언제부터 식당들이 이렇게 휴식 시간을 철저히 지켰냐며 나는 투덜거렸다.


내가 다시 다른 집을 찾아보자며 앞서 걷던 그때였다. “짝!”하고 등에서 찹쌀떡 찧는 소리가 났다. 화가 난 아내가 집에 그냥 가자는 자신의 의견을 묵살하고 옹고집을 부리는 나에게 분노의 일격을 날린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점심을 거른 채 집으로 향해야 했다. 나는 삐졌고 아내는 화가 났다. 차 안에서는 정적만 흘렀다.


기분 좋게 출발했던 우리의 주말 나들이가 악몽으로 변한 건 애초 맛집 검색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명 관광지에 가면 많은 사람이 맛집에 몰릴 테고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터. 여유 있는 여행과 만족스러운 외식을 기대했던 우리의 여행이 틀어져 버린 건 어쩌면 그러한 사실을 예견하지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스마트폰과 SNS의 발달로 사람들은 어느 지역을 방문할 일이 생기면 사전에 맛집 검색부터 하고 본다. 그러다 보니 유명 음식점에 사람들이 더욱 몰리게 되어 식당업계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더욱 크게 벌어지는 듯하다.


식당업은 원래 ‘레드오션’이다. 유난히 자영업자가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평균 삼천 명이 식당을 시작하고 이천 명이 폐업한다고 한다. 그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는 것도 어려운데 식당들은 코로나19로 깊은 시련을 겪어냈다. 이제 유행병도 잦아들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완화되어 기지개를 켜고 있다.


15년에 걸쳐 완성한 만화 <식객> 시리즈의 허영만 화백은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식사 후 다음 끼니때까지 입안에 은근히 남는 맛을 최고로 쳤다.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 유명한 맛집을 돌아본 그가 첫손가락에 꼽은 맛집은 다름 아닌 평범한 백반집이었다고 한다. 깊은 정성으로 빚어낸 요리는 맛을 넘어 감동을 전해주기 때문이리라.


음식점을 평가하는 세계적인 권위의 ‘미슐랭 가이드’에는 별 점수(별 3개가 최고 점수다) 이외에 ‘빕 구르망’이라는 것이 있다. 합리적인 가격에 훌륭한 음식을 제공하는 식당에 부여한다고 한다. 금ㆍ은ㆍ동메달까지는 아니지만, 가성비 높은 맛집쯤 될 것이다. 다양한 문화와 환경에서 자라온 사람들에게 음식의 맛은 주관성이 강하다. 특정인들에 의해 식당의 등급이 평가된다는 것은 분명 한계성을 지니지 않을까.


나는 우리 주변의 많은 음식점이 지역민들의 ‘빕 구르망’으로 제대로 평가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미슐랭 별점을 받은 음식점 부럽지 않은 맛과 여행지의 감동을 더욱 배가할 수 있게 하는 식당들이 많이 늘기를 희망한다. 식당을 찾아 헤매거나 심지어 굶고 오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지난 주말의 일은 어쩌면 ‘맛집 찾기’라는 세태에 내가 편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음 여행지에서는 맛집도 좋지만 나의 안목으로 동네 식당을 용기 있게 선택해 보려 한다. 누가 아나 허영만 화백처럼 인생 맛집을 찾게 될지.


그날 오후 아내가 표충사 앞 할머니에게서 샀던 밤을 쪄서 내왔다. 아궁이에서 쪘는데 20분간 센 불로 가열하고 10분간은 뜸을 들였다고 했다. 요리라 할 것도 없지만 삶기, 굽기, 졸이기, 찌기 등 다양한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해서 매운 연기에 눈을 찡그리며 조리해온 것이었다. 햇밤의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식사는 못하고 그냥 왔지만 그래도 우리는 밀양의 맛 하나는 건져 왔다.


등짝에 불이 나도 맛집 탐방은 계속될 것이다.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남이 해 준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그날까지.


밝은 햇살 속에서 토실하게 여문 알밤 하나를 은달이에게 던져주니 ‘오도독’ 거리며 맛나게 먹는다. 누가 뭐 라건 별점 3점짜리 셰프인 아내의 식탁에서는 오늘도 웃음소리가 하늘로 향하고 저녁노을이 붉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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