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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의 속이 붉은 이유

by 힉엣눙크

지난주에 대구를 다녀왔다. 김광석 거리를 천천히 둘러보고 오후에는 해설사를 앞세워 근대문화 골목 투어를 했다.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단체로 줄지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야단이었다. 청라언덕에 위치한 옛 선교사 주택들을 돌아보고 계산성당에 도착했을 때였다.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한 건물, 하나하나 쌓아 올린 벽돌의 붉은색이 100년도 더 지났건만 어제 쌓은 듯 선명했다. 나는 그 건물이 소환해내는 오래전 기억 때문에 붙박인 듯 한동안 멈춰서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오후 수업 쉬는 시간에 담임선생님이 나에게 오더니 가방을 싸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담임선생님에게 전화로 귀가 조처를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5학년 교실에 가니 여동생도 가방을 싸고 있었다.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나와 여동생 그리고 막냇동생을 데리고 마산역으로 향했다. 대구행 기차표를 끊고 서서히 미끄러지며 나아가는 객차 안에서 아버지는 우리 형제를 향해 말했다.


“엄마가 너희들이 많이 보고 싶으시대. 소풍 삼아 가보자꾸나. 좋지?”


나와 여동생은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있다는 걱정이 마음 한쪽에 머물러 그렇게 표정이 밝지 않았다. 몇 개월간 얼굴을 보지 못한 엄마를 만난다는 생각에 막냇동생은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마냥 신나 했다. 게다가 그에게 기차는 난생처음 타는 것이었다.


우리 형제들이 명절 때 어른들로부터 용돈을 받으면 나와 여동생은 주전부리에 장난감 같은 것들을 거침없이 샀다. 용돈은 며칠 가지도 않아 동이 나 버리곤 했다. 하지만 막냇동생은 좀체 뭘 사 먹지도 않고 그저 모아만 두는 성향이 있었다. 동생의 돼지 저금통은 우리 형제 중에서 언제나 제일 무거웠다. 어느새 용돈을 다 써버린 나와 여동생은 막냇동생을 억지로 구슬려서 과자를 사 먹게 하고서는 뺏어 먹었다. 막냇동생의 저수지는 둑이 높아서 채우기만 할 뿐 방류는 드물었다.


아버지와 함께 엄마를 만나러 도착한 그곳은 계산성당처럼 붉은 벽돌로 근대에 지어진 오래되고 큰 건물이었다. 주변에는 거대한 히말라야삼목이 왕을 호위하듯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검푸른 빛이 감도는 그 나무들은 가지를 축 늘어뜨려 그 장소를 더욱 엄숙하게 만들고 있었다. 주변 벤치에는 흰색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있었는데 더러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건물 현관에 들어서자 포르말린 냄새가 훅 끼쳤다.


엄마가 있는 병실 문을 열었다. 침상이 여럿이었다. 병시중을 들던 막내 고모가 우리를 맞았다.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창문가 옆 침상에 누워있던 엄마는 방금 잠이 들었다고 했다. 우리는 나란히 침상 옆에 서서 엄마를 불렀다. 조용히 눈을 뜬 엄마는 웃음 대신 와락 눈물부터 흘리셨다. 9살 어린 남동생을 보시더니 꼭 끌어안고 한참을 놓지 않았다. 엄마는 유난히 막내를 귀여워하셨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유독 어린 막내를 애틋하게 아끼셨다.


막내가 “엄마 많이 아파?” 하고 묻자 삭발한 스님처럼 민머리로 누워있던 엄마의 얼굴에는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만 저었다. 기력이 많이 쇠해진 엄마는 말이 거의 없었고 몇 마디도 힘겨워했다.


“엄마 언제 집에 와?” 여동생의 말에 엄마는 “곧...”이라 말하고 우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별다른 대화 없이 우는 듯 웃는 듯한 표정으로 한참 우리를 바라보던 엄마는 힘겨운지 다시 눈을 감았다. 옆에서 막내 고모가 피곤한가 보다며 아버지에게 눈짓을 했다.


어둠이 내린 저녁 무렵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열차를 탔다. 4명이 서로 마주 보며 앉았다. 열차 승무원이 간식 카트를 밀고 통로를 지날 때 아버지는 병 우유와 빵을 사서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아버지는 먹지도 않고 물끄러미 창밖 풍경만 바라보았다. 기차가 덜컹거리면서 미끄러져 가자 아버지가 손수건을 꺼내 몰래 눈가를 닦았다.


나와 막냇동생이 한창 먹고 있는데, 뜯지도 않은 빵과 우유를 손에 쥔 채 여동생이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막내는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울었다. 나는 목이 멨고 아버지는 붉게 충혈된 눈망울로 그런 우리를 달랬다. 주위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둥그런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몰래 울음을 삼키느라 흔들리던 아버지의 등처럼 야간열차는 한밤을 건너서 고향으로 향했다. 몇 년 뒤 엄마가 돌아가셨다. 나와 여동생은 담담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차곡차곡 채워왔던 물이 둑을 일시에 무너뜨린 듯 막냇동생의 울음은 크고 그칠 줄 몰랐다.


왕조가 무너지고 외세가 침략해 오던 우리나라 근대 개화기의 건물들을 돌아보던 나는, 투어의 막바지에 시인 이상화 고택을 찾아 마루에 앉았다. 마당 한가운데는 석류나무가 있었다. 나는 빨갛게 익어가는 석류 열매를 바라보다가 붉은 기억을 지고 인생의 강을 헤매는 내 영혼을 가만히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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