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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Jun 24. 2023

세상살이에 체했을 때 부르는 노래

월요일 아침에는 왜 항상 차가 막히는지. 꽉 막힌 출근길 도로에서 시계를 힐끔거리며 마음이 급해지는데 일주일 동안 해결해야 할 일들과 만나야 할 사람들이 머릿속을 꽉 메웠다. 가슴이 갑갑했다. 꼭 체한 것처럼. 

    

그때였다. 할머니가 내게 불러주시던 노래가 문득 생각났다.


“묵고지바 무따. 술렁술렁 내리가라. 묵고지바 무따. 술렁술렁 내리가라.”


내 어릴 적, 속이 체했을 때면 배를 쓸어 주면서 불러주시던 노래였다. ‘묵고지바 무따’는 ‘먹고 싶어 먹었다’의 경상도 방언이다. 심하게 체하면 속이 메슥거리면서 기분이 나쁘고 얼굴이 노랗게 변한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반짇고리를 들고 나오셨고 식구들은 구경이 난 듯 우르르 몰려와 둘러앉았다.


먼저 머리부터 두드리듯 쓸어내린다. 그리고 체한 사람의 손을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마치 손끝으로 피를 모으듯 어깨에서 손목까지 쓸어내리기를 반복한다. 어느 정도 피가 쏠렸다 싶으면 엄지손가락 첫마디 부분에 실을 몇 차례 칭칭 감아서 피가 돌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바늘을 코에 대고 ‘흠흠’ 거리며 콧김을 불어넣고 또 머리에 대고 몇 차례 쓸어서 머릿기름도 바른다. 이윽고 두려운 순간이 온다. 체한 사람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린다. 어린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실로 동여맨 바로 아래 그러니까 엄지손톱 뿌리 바로 위, 피가 몰려 약간 부풀어 오른 부위를 바늘 끝으로 순식간에 딴다. 수직으로 꾹 눌러서 구멍을 내는 것이 아니다. 물수제비를 뜨듯 바늘 끝을 약 45도쯤 기울이고 가볍게 튕기듯 따야 한다. 너무 세게 따면 상대가 아프고 너무 약하게 따면 피가 나지 않아서 몇 차례 반복해야 해서 고통스럽다. 단번에 제대로 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노련한 투우사가 성난 황소의 돌격을 잽싸게 피하면서 정확하게 급소를 찌르듯이. 시커멓게 붉은 피가 이슬 맺히듯 동그랗게 솟으면 제대로 딴 것이다. 체한 사람에게 시커멓게 죽은 피를 보여주며 확인시키고 닦아내면 ‘손 따기’는 마무리된다.


따고 나서 가만히 누워 있으면 할머니는 배를 쓸어 주면서 나지막이 민요조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할미손은 약손

묵고지바 무따 

술렁술렁 

내리가라”


몇 차례 반복하면 스르르 속이 편안해지고 시원해졌다. 희한하게도 소화제보다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체할 때면 아픈 것도 무릅쓰고 할머니께 따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이야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할머니가 불러주던 노래가 어린 나이인 내게도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프니까 빨리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거나 겸손하게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노골적이고 당당해서였다. ‘먹고 싶어 먹었을 뿐이다. 그러니 급체야 썩 내려가거라’라는 할머니의 말은 솔직하면서 다소 뻔뻔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학창 시절 배웠던 구지가가 생각난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고대가요로 왕이 없던 고대 가야사람들이 구지봉에 모여서 노래를 부르자 6개의 알이 내려왔고 그것이 6가야의 시조가 되었는데 제일 큰 알에서 나온 사람이 수로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구지가 가사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한다. 신에게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내려보내 달라고 백성들이 불렀던 노래라고 보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백성들이 모여 왕을 내려달라고 주술행위를 벌인다면 당연히 빌거나 기원하는 형태여야 할 텐데 오히려 당당히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다. 할머니의 노래도 마치 구지가처럼 당당했다.


할머니의 노래를 곰곰이 되씹어 생각하니 구지가의 의미가 이해되었다. 가야사람들은 체계적인 통치제도와 현명한 지도자를 필요로 했을 것인데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은 하나의 역경이요 시련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속이 체한 것처럼.


고대인들은 임금이 부재한 상황, 즉 임금이 태어나지 않는 부정한 상황을 몸에 든 병마처럼 대상화해서 어서 썩 물러가라고 주술적인 노래를 불렀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선조들은 역경에 주눅 들거나 강한 힘에 기대어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원하기보다는 오히려 꿋꿋한 자세로 시련이 스스로 물러갈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주술적인 노래로 쫓아내면 해결되리라 믿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과 전통이 우리의 혈액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할머니의 노래에도 깃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얽히고설킨 일상의 실타래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보다 미워하는 마음이 자주 또 오래 똬리를 틀어서 나를 괴롭히곤 한다. 월요일 출근길 꽉 막힌 도로에서 느끼는 가슴속 갑갑함 같다. 그럴 때 할머니의 노래가 생각나는 것은 나의 몸이 오래 기억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할머니는 내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셨다. 철없는 손주의 어리광도 어깃장도 아집도 말없이 받아주셨다. 항상 잘 되기를 바라고 또 기도하셨다. 뭣 하나 기대에 맞춰 잘해본 적도 없고 그렇다고 번번한 효도 한 번 못 해 드렸는데 황망히 떠나셨다.


욕망의 거리를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할 의미가 텅 빈 지갑처럼 가벼워지면 가슴은 또 왜 그리도 얹힌 듯 갑갑한지. 그렇게 세상살이에 체할 때면 따끔하게 따주시던 할머니의 손길이 간절히 그립다. 내 아픈 배를 쓰다듬으며 불러주시던 할머니의 노래를 오늘 가만히 나 혼자 읊조려 본다.


“묵고지바 무따 술렁술렁 내리가라. 묵고지바 무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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