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해도 작동되지 않던 기계가 수리센터에 도착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잘 돌아가는 것이었다.
“분명 지금처럼 똑같이 했는데 왜 집에서는 안 되고 여기 오면 잘 될까요?”
수리기사는 대답 대신 한심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지난 초봄 집에서 나무를 자르려고 엔진톱을 꺼내 시동을 걸었다. 가속 레버를 당기자 ‘투둑’하더니 시동이 꺼져버렸다. 너무 세게 당겼나 싶어 군 복무시절 사격장에서 조교가 말하곤 하던 야한 비유를 소환하며 아주 부드럽게 당겨도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혹시 기름이 오래돼서 그런가 하고 새로 구입해서 넣어보기도 하고 작동 순서에 잘못은 없었는지, 엔진오일은 적정한지 이것저것 다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스트레스 수치만 잔뜩 오른 상태에서 나는 결국 애물단지 기계를 차에 싣고 수리센터로 향했었다.
며칠 전 점심식사를 하던 중 누군가 말했다. 집에서 통증이 심해 병원을 찾았는데 막상 병원에 도착하니 그렇게 심하게 느껴지지 않더라고 했다. 마치 꾀병을 부리다가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얘기했다.
“비슷한 경우인데, 분명히 집에서는 머리가 길어서 미용실에 갔는데 거울 앞에 앉아보니 생각보다 길지 않아서 괜히 왔나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어요. 그렇다고 미용보를 벗고 일어설 수도 없어 그냥 깎았죠.”
재치 있는 맞장구에 다들 웃었다.
누군가 말했다. “비슷한 경험 다들 있지 않나. 이런 것도 플라시보 효과인가?”
의사가 건네준 가짜약도 환자가 진짜라는 믿음을 가지고 먹으면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을 플라시보 효과라고 한다. 하지만 집에서는 많이 아팠는데 병원에 가면 덜 아픈 것은 어떤 효과 때문일까. 의사를 만나지도 처방을 받지도 않았고 심지어 약도 안 먹었는데 말이다.
우리가 고통을 경험한다는 것은 몸이 통증을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뇌가 그것을 통증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바늘로 손가락을 찌르면 손가락이 아픈 것이 아니라 손가락 부위의 자극이 뇌에 전달되어 그 부위에 통증이 있다고 뇌가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과학자가 실험을 했는데 갑, 을, 병 세 사람 모두에게 얼음물에 손을 담그고 각자가 느끼는 고통의 정도를 측정했다고 한다. 세 사람에게는 각각 조건을 달리했다. 갑은 혼자, 을은 아는 사람과 함께, 병은 모르는 사람과 같이 있는 방 안에서 얼음물에 손을 담갔다고 한다. 실험 결과 가장 고통을 많이 느낀 사람은 혼자 얼음물에 손을 담그고 있던 사람 즉, 갑이었다고 한다. 가장 덜 고통스럽게 느낀 사람은 아는 사람과 함께 있었던 을이었다. 흥미롭게도 모르는 타인과 함께였던 병도 혼자 있었던 갑보다는 덜 고통스럽게 느꼈다는 것이다.
“지난 주말에 차를 타고 가다가 부인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봤어요.”
몇 년 전, 아는 지인이 내게 말했다. 인근에 아내와 산책 나가는 모습을 보았던 것 같았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이 다정해서 보기 좋았어요.”
관광지에서 중년이 넘은 커플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는 농담이 있다. 손을 잡거나 스킨십을 하고 가는 커플은 불륜관계이고 모른 척 앞 뒤로 떨어져 걸어가면 부부사이라고 한다. 지인이길 망정이지 모르는 사람이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도 ‘불륜커플이네’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외롭거나 고통스러울수록 방안에 칩거하기보다는 밖으로 나와서 거닐고 누군가와 연락하고 만나고 하며 살아가야겠다. 우리의 뇌는 가족이나 친밀한 사람은 물론이고 모르는 사람이나 반려동물과 함께 있기만 해도 외로움이나 고통은 덜 느끼고 안정감이나 행복감은 더 느낀다고 하니 말이다.
외롭거나 괴로울 때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가만히 잡자. 옆에 사람이 없다면 내 손을 내가 잡아도 좋을 것이다. 상처가 빨리 아물 수 있는 치유의 힘은 함께 할 때 커지니까.
점심 식사 때 얘기 나눴던, 집 안에 혼자 있을 때 너무 아파서 병원을 찾았는데 정작 병원에 도착하니 별로 아프지 않는 그런 현상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아마도 병원 로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고통을 덜 느끼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현상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함께여서’ 효과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밖에서 거닐 때면 항상 내 손을 잡는 아내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사람들의 시선도 있고 하니 손 놓고 그냥 다니면 안 되겠냐고. 그러자 아내가 대답했다.
“불륜이라고 하면 어때. 팔십이고 구십이고 손잡고 다닐 거야.”
알고 보니 아내는 나의 외로움과 고통을 나도 모르게 쉼 없이 덜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평생을 그렇게 계속할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는 참 바보였다. 그녀가 내 마법사인 줄 오늘에야 깨달았으니 말이다. 군말 없이 잡혀주고 자주 많이 잡아줘야겠다.
수리를 맡겼던 그 애물단지 엔진톱은 어떻게 되었을까? 집으로 그냥 가져와서는 다시 한번 엔진의 시동을 걸었다. 손잡이를 잡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이윽고 가속 레버를 천천히 당겼다. 그러자 ‘윙’하는 굉음과 함께 힘차게 돌아갔다. 잠에서 깨어난 사자처럼.
기계한테도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함께여서’ 효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