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빛정원 May 27. 2023

가락지에 새겨진 사연

“주남저수지가 철새 도래지로 처음 유명해진 게 누구 때문인 줄 아시오?”


며칠 전 자료를 요청하기 위해 창원 지역의 근현대 사진 자료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는 주남저수지 터줏대감을 만나러 갔을 때였다. 그가 우리를 보더니 대뜸 물었다.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었다.


“윤무부 박사 아닌가요?”하고 내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러자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주남저수지가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78년 자연보호헌장이 선포된 후 조류학자인 원병오 박사가 전국의 조류분포를 조사하러 주남저수지에 들렀다가 동양에서 철새들이 가장 많은 곳이라는 발표를 하고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윤무부 박사는 원병오 박사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에게 가슴 아픈 사연이 하나 있어요.”

 

우리는 모두 창문 밖으로 펼쳐진 주남저수지를 바라보았다. 근처 다호리, 화양리, 금산리 등 여러 마을과 산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모여 이뤄진 저수지에는 여름 철새 몇몇 무리만이 간간이 날아다닐 뿐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5월의 햇살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수면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얘기가 이어졌다.


원병오 박사는 경기도 개성군에서 해방 이전 한국에서 유일한 조류학자였던 원홍구의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새를 보러 다녔다. 대학생 시절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남하여 정착했다.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던 고향 땅.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철책으로 가로막혔고 편지는커녕 부모님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15년의 세월이 흘러 그의 아버지 원홍구처럼 그도 한국에서 조류학의 대부가 되었다. 원병오 박사는 1963년 서울 홍릉 임업시험장에서 ‘북방 찌르레기’ 발목에 표지 가락지를 부착해 날려 보냈다. 표지 가락지는 새의 이동 경로를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데 당시 국산 가락지가 없어서 ‘Japan'이라 표기된 일본산 가락지를 써야만 했다.


'북방 찌르레기'는 초여름에 태어나 가을이 되면 겨울을 나기 위해 남하했다가 봄이 되면 북상하는 새라고 한다. 원병오 박사가 가락지를 부착하여 날려 보낸 새 중에 한 마리가 평양 근처에서 포획되어 당시 북한 생물학연구소 소장이었던 원홍구 박사에게 보내졌다.


‘농림성(農林省) Japan C7655'라고 표시된 가락지를 본 원홍구 박사는 일본에는 북방 찌르레기가 서식하지 않을뿐더러 경유하지도 않는데 가락지를 부착한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도쿄의 국제조류보호연맹 아시아지역 본부에 문의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남한의 원병오라는 조류학자가 달아 준 가락지였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전쟁 통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막내아들이었다.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원병오 박사의 어머니는 남편이 철새 다리에서 떼어낸 가락지를 받아 들자 어루만지며 목놓아 흐느꼈다고 한다. 아들과 헤어지던 마지막을 꿈에도 잊은 적이 없었을 그녀는 죽는 날까지 막내아들이 보낸 가락지를 고이 간직했다고 전해진다.


원병오 박사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30년이 지난 2002년이 되어서야 북녘의 고향 땅을 밟게 되었다. 그는 부모님의 산소에 절을 하며 크게 울었다고 한다.


초파일 아침에 은달이를 포함한 온 가족이 도보로 주남저수지에 다녀왔다. 월잠마을 뒷산에 새로이 조성한 전망대까지 올랐다. 고갯마루를 오르자 눈앞에 펼쳐지는 호쾌 하면서도 어여쁜 절경에 모두 감탄을 터뜨렸다.


나지막한 산들이 올망졸망 어깨동무를 하고 저수지를 둘러싸더니 너른 들판으로 사라졌다. 초록의 싱그런 산빛이 저수지에 수줍게 비치어 있었고 들판은 모내기를 위해 저수지의 물을 받아들여서 반짝였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속에서는 향긋한 들꽃 향기가 실려 있었다. 내가 사는 마을 바로 옆에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유산이 살아 숨 쉬고 있다니 나는 그저 감사했다.


감나무 과수원 연초록 이파리들과 인사하고 커다란 연꽃잎들이 푸르게 피어나는 들판에서 노래하며 이정표처럼 서 있는 팽나무 옆을 휘돌아 지나는 비포장 흙길 위를 오래 걸어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5월의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그 길을 걸어서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휘파람새와 멧비둘기 그리고 산꿩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꿈길을 걸어온 듯 아련한 여운이 지금도 맴돈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어도 만날 수 없는 절망 속에서 북방 찌르레기를 통해 기적처럼 생사를 확인한 원병오 박사처럼 슬프고도 기구한 사연들은 이제 하나 둘 잊혀 가고 있다. 분단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동질감보다는 이질감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 더욱 그리워지는 오월이다. 올해도 우리 집 태양광 기둥에 찌르레기 한 쌍이 둥지를 틀었다. 부화한 새끼가 제법 커져서 이제 비행 연습을 막 시작하려고 한다.


저들이 떠나기 전에 찌르레기의 가느다란 다리에 나의 안부가 새겨진 가락지를 매어주고 싶다. 멀리 떠나가서 저 하늘 끝 어딘가 부모님에게 내 소식 전해줄 수 있도록. 조그만 가락지에는 그리움에 가슴 아픈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원망한 날들도 많았다고. 이제는 이해하고 사랑한다고 그리고...


“감사합니다.”


연꽃잎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오늘, 주남저수지에는 사람들이 그어놓은 경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희망을 실어 나르는 새들이 평화롭게 머물고 있다.









커버이미지 사진출처 : 환경부

작가의 이전글 앵무새가 기억하는 그 말 한마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