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를 집으로 가져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얼마 전 직장 후배가 던진 질문이었다. 업무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가 일상의 삶을 침범해서 괴롭다는 속내가 질문 속에 담겨 있었다. 동병상련이었을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뚜렷하게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가루약을 털어 넣고 쓴맛을 느낀 사람들처럼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갔던 때가 불쑥 생각이 났다. 사이다를 꺼냈는데 병따개가 없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사이코패스 같은 고객이 불도그처럼 지독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앙버티고 으르렁거리며 괴롭히는 사건이 일어난 날. 누군가로부터 무시당해서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날. 기한은 다가왔는데 일이 난마처럼 얽힌 날. 당신은 그날 밤 쉬 잠들 수 있는가. 가능하다면 당신은 목석이리라.
당연히 업무 스트레스가 쌓이면 충분히 휴식을 취할 수 없고 재충전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어 직장생활이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에 이를 수 있다. 결국 업무와 개인생활 둘 다 망가지게 되고 제일 중요한 자신의 건강까지 위협받게 된다.
직장과 가정의 슬기로운 분리는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일과가 끝난 후 업무지시 등 외적인 영향은 제쳐두고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스트레스나 생각의 괴로움을 어떻게 해소하거나 관리할 수 있을까.
업무 스트레스가 파도처럼 밀려올 때, 동굴 속에서 무기력하게 고통을 감내할 때도 있겠지만 쌓인 스트레스를 필터처럼 거르거나 완충재처럼 줄여줄 수 있는, 예를 들어 운동이나 취미생활 등으로 해결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적절히 조절하기가 말처럼 쉽다면 후배가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사실 반추동물이다. 소나 염소가 풀을 삼켰다가 다시 토해내서 되새김질하듯 우리도 지난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에 다가올 걱정들을 반복해서 게워내고 떠올려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냉정한 얘기 같지만 업무와 가정생활의 완벽한 분리는 미션 임파서블이다. 당신이 영화 속 톰 크루즈가 아닌 이상 그것을 이루기란 일생을 바쳐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된다는 보장은 없다.
인생사 괴로움의 소멸을 추구하거나 신에 의지해서 당나귀 같은 육체를 벗어나 구원을 이루려는 종교행위와 궁극적으로 맥을 같이한다. 결국 행복을 향유하기 위해서 어떻게 우리의 삶을 잘 관리할 것인가 하는 인생의 문제로 귀결된다 할 것이다.
아무도 병따개를 챙기지 않았다. 친구들은 어떻게 병을 딸 것인가 잠시 고민을 했다. 병은 하나였다. 담배를 피우는 녀석이 없어 라이터를 이용할 수 없었다. 근처에 테이블도 없어서 모서리를 활용할 수도 없었고 쇠로 된 숟가락이나 젓가락도 없었다. 한 친구가 나서서 이빨로 따려고 하자 다친다며 모두 말렸다. 나무젓가락으로 시도하던 친구는 결국 젓가락을 모두 부러뜨리는 바람에 우리는 김밥을 손으로 먹어야 했다. 다른 친구가 눈으로 따보겠다며 차력사처럼 폼을 잡더니 한쪽 눈에 병뚜껑을 대고 입으로 ‘칙’하는 소리를 내어 모두를 웃겼다. 그때 다른 친구는 해탈한 사람처럼 “사이다 그까짓 것 그냥 안 먹으면 된다”고 일갈했다. 그러자 또 다른 친구는 병을 홱 뺏더니 바위에 부딪혀 주둥이를 깨뜨려버렸다. 사이다가 절반가량 쏟아졌지만 단칼에 베어버린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결국 병을 따고야 말았다. 하지만 아무도 마실 수 없었다. 유리 파편이 섞여 들었기 때문이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소풍은 포기하고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우리는 집으로 향했다. 종점인 버스정류장에서 드문 차편을 기다리던 우리는 버스 대신 집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다. 전쟁 시 비상 활주로로 사용하기 위해 닦았다고 전해지던 끝없이 길게 이어진 창원대로를 걷고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소실점 같은 길 끝은 낮게 드리운 구름으로 가려져 있었고 통행하는 차량이 가뭄에 콩 나듯 하는 8차선 대로변에는 코스모스가 한창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우리들은 깔깔거리며 뛰고 걸었다. 세 시간을 넘게 걸어서 도착한 마산 합성동. 우리는 2본 동시상영 극장으로 향했다. 캐나다 영화 ‘예스터데이’와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 우리나라 영화 그렇게 두 편을 상영했다. 우리들은 액션 영화가 아니라며 망설이다가 다른 대안도 없어 그냥 표를 끊었다.
‘예스터데이’는 월남전을 배경으로 하는 청춘남녀의 애틋한 사랑 얘기였다. 아이스하키 선수와 사랑에 빠진 여자. 결혼을 약속했으나 남자는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고. 헤어지기 전 잉태했던 뱃속의 아이. 애타게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남자가 안타깝게 전사하고 말았다는 얘기를 전해 듣는다. 혼자 아이를 낳고 기르다가 남자의 부모에게 아이와 함께 찾아간 여자. 아이의 존재를 몰랐던 남자의 부모는 당황하게 되고 죽은 줄 알았던 남자가 사실 군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극적인 재회의 자리. 남자는 교전 중에 다리를 잃어서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를 위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숨겼던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그를 잊지 못했다. 둘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포옹하던 마지막 장면에서 흐르던 노래 ‘스마일 어게인(Smile Again)'의 선율. 애잔한 멜로디가 영화의 장면과 함께 아직도 기억난다.
나중에 알았는데 영화 속 그 음악은 국내 수입사에서 당시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하던 ’ 뉴튼 패밀리‘의 곡을 영화의 절정 부분에 임의로 삽입했다고 한다. 어쨌든 캐나다와 우리나라의 합작(?) 영화에 우리의 기억이 함께 얽혀서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우리들의 소풍은 병따개 없이 병을 따는 방법을 모색하고 빗속을 걸어 관람한 추억의 영화로 기억된다. 삼십 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고 병을 따려고 고민하던 친구들 중에 한 명은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요즘 백 년 동안 없었던 더위, 백 년 동안 없었던 추위, 백 년 동안 없었던 수많은 기상이변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나도 모르게 반추되는 걱정의 고리와 뱀처럼 똬리 트는 머릿속 전쟁은 그칠 줄 모르고 우리들의 욕망도 그처럼 잘 제어되지 않는다. 그런 나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세상은 브레이크 대신 가속페달을 밟고 현기증이 날 만큼 빠르게 어디론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병따개 없이 병을 따야 하는 난감한 상황처럼 지구도 똑 부러지는 해결책 없이 열병을 앓고 있다. 9회 말 만루홈런처럼 그렇게 ‘딱’하고 펜스를 넘기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구의 문제가, 우리의 문제가, 그리고 바로 나의 문제가 7가지 방법 중 어느 것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인지 누군가 팥빙수처럼 속 시원히 알려주면 좋겠다.
7년을 땅속에서 인내하며 끝까지 살아남아 여름 하늘 가득 삶의 찬가를 부르는 매미처럼 언젠가 우리 모두 다시 활짝 웃을 수(Smile Again)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