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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Oct 03. 2023

아프니까 인생이다

응급실에 갔다가 바로 입원했다. 해열제를 투여받았지만 열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난타했다.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갑자기 끌려 나와 링 위에 올려졌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상대는 나를 코너로 몰아세워 놓고 끝이 날 것 같지 않는 고통의 펀치를 후려쳐댔다. 나는 쓰러졌고 고통의 바다에 풍덩 빠져 버렸다. 탈출하려고 허우적거렸지만 나의 몸은 점점 침잠할 뿐이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수압이 높아지고 사위는 어두워졌다. 극심하던 고통은 어느덧 잠잠해져 갔다. 귓속을 맴돌던 소음과 사람들의 말소리도 차츰 고요해졌다. 나의 의식은 옅어졌고 모든 것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힘없이 작아졌다.


영화 ‘그랑블루’에서 자크는 프리다이빙 선수였다. 에메랄드빛 지중해 바닷속으로 깊이깊이 내려갔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숨을 참으며 내려가는 그의 모습과 점점 어두워지는 심해의 바다는 지켜보는 사람들의 숨까지 가쁘게 했고 불안과 공포감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스크린 속의 자크는 고향에 온 듯 오히려 편안하고 차분해 보였다.


이따금 간호사가 잠을 깨워 열과 혈압을 체크했다. 그러더니 부산스럽게 나를 깨웠다. 심박수와 혈압이 너무 낮아졌다고 말하며 침상을 조정해서 다리를 높였다. 나는 고통이 잦아드는 세계로 점점 빠져들었다. 의식이 희미해질수록 고통은 점차 줄어들었고 미쳐 날뛰던 마음도 조용해졌다. 그 상황에서 더욱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하지만 공포스럽거나 불안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명상에 든 듯 고요해졌다.


누군가 또 깨웠다. 흰색 가운에 마스크 그리고 안경을 쓴 담당의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간밤에 심박수와 혈압이 낮아져서 위험해졌다고 했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중환자실로 내려가야 한다고 다소 긴장된 말투로 말했다. 염증지수도 위험수위를 넘어서서 항생제를 좀 더 센 것으로 바꿔보겠다고 덧붙였다.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짙푸른 바닷속, 폐를 압박하는 수압 속에서 아무런 보호장구 없이 숨을 참고 있는 자크의 모습은 평안해 보였다. 이윽고 그가 눈을 떴다. 서서히 줄을 잡아당겼다. 아득하게 보이는 수면을 향해 돌고래처럼 몸을 흔들며 천천히 올라갔다.


나는 자주 꿈속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꿈인지 혹은 현실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바다 깊숙이 내려앉은 침상에 누워 있는데 고개를 돌리니 다른 누군가가 곁에 마주 보고 옆으로 누워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사람 형상을 갖춘 바위였다. 그 모습이 흡사 엄마인 것 같았다. 그 순간에는 엄마가 오래전 돌아가셨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았다. 엄마 형상을 한 그 바위는 눈을 감고 말없이 누워만 있었다.


“산다는 게 왜 이렇게 고통스럽나요? 살아온 날들이 부끄럽고, 외롭고, 쓸쓸하고, 슬프고, 화가 납니다. 왜 기쁨은 잠시 머물고 고통은 길게 이어집니까?”


이십 대 푸른 시절,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소용돌이를 십자가처럼 짊어지고 지리산에 올랐었다. 홀로 종주를 하며 묵묵히 걷고 걸었지만 가슴속 갑갑함은 그대로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도 하고 온몸의 근육이 고통으로 뒤덮였지만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가느다란 실마리라도 찾고 싶은 내게 새로운 길도 축복의 희망도 일체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산맥과 눈이 시리게 총총한 은하수를 담담히 펼쳐서 보여줄 뿐이었다. 병상에서 꾸는 꿈 속에서 마주한 엄마 형상의 바위도 그처럼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그 바위를 바라보며 나는 그저 편안함을 느꼈다. 그 순간 눈이 떠졌다. 한밤중이었고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건너편 침상에 누워서 잠이 든 환자의 코 고는 소리만 가느다랗게 들렸다. 점점 나의 심장이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희미하게 보이는 수면을 향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다행히 중환자실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상태는 점차 호전되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고통은 오롯이 나의 것이었다. 고통은 나라고 하는 실존성을 보다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압박했다. 고통만큼 정확하고 확고하게 현실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은 없는 듯하다. 동물들이 진화를 거치면서 획득한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 고통이므로 어쩌면 우리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너무도 당연할 터이다.


고통이 잦아들고 식사도 가능해졌다. 그제야 건너편에 누워있던 환자가 보였다. 항암치료를 위해서 한 달에 두 번 2박 3일간 입원하여 항암제를 투여받는다고 했다. 그가 아무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폐암 4기라고 했다. 내가 고통스럽지 않냐고 묻자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제 적응이 돼서 괜찮다고 했다. 말기암 환자라면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진 내게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 초연해서 마치 구도자처럼 보였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고통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통증의 크기를 계량할 수 있다면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하겠지만 대부분 의연하게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며 살아간다. 우리가 고통을 겪는 사람을 안다고 해도 그의 고통은 알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아플 때면 나만 빼고 다들 행복해 보인다.


그녀를 만난 건 대학교 2학년 1학기 때였다. 나는 대학생활이 좋았다. 그래서 한 학년을 더 충분히 즐기고 군대를 가려했다. 친하게 지내던 상당수 동급생들은 다들 군에 입대를 했고 군복무를 마친 복학생들이 대신 그 자리를 메웠다. 복학생 중에 여학생도 하나 있었다. 1년을 쉬고 복학했는데 나이는 나랑 같았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그녀가 탔다.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더니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주로 대학생활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단발머리에 화장기가 하나도 없었다. 예쁜 편이었지만 외모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크고 맑은 눈망울과 오똑한 콧날. 하지만 어딘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 대화를 나눌 때는 조곤조곤했지만 자신만의 얘기를 끝까지 하려는 고집이 있었다.


“하이데거가 말했대. 경험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라고.”


뜬금없이 던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당황스러웠다.


“살아가는 일이 다 그렇지. 대학입시를 어렵게 통과하면 군에 가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어려운 취업문을 통과해야 하고... 삶은 허들경기처럼 고비를 넘기는 일의 연속이 아닐까.”라고 대꾸했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얘기를 이었다.


“내가 보는 세상은 고통에 직면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어.”


묵직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어법이 예사롭지를 않았다. 마치 앞서 살아본 사람 같은 말투였다.


“살아가는 일이 고통만 있는 건 아니잖아. 즐겁고 기쁘고 또 희망을 향해서 두근거리는 과정도 있고 말이야.”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차갑게 내뱉었다.


"그건 대부분 가짜야. 맥주의 거품 같은 거야. 거품은 곧 사라지고 우리는 맥주를 들이켜야 해.” 나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녀는 말을 빠르게 이었다.


“넌 고통이란 걸 제대로 느껴봤어?”


“....”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누구나 관념상으로는 알고 있지만 아프기 전까지는 깊이 깨닫지는 못해. 나의 세계와 사람들과의 관계도 언젠가 모두 잃게 된다는 건 진리야. 그건 죽어야 제대로 알 수 있지. 하지만 죽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고통의 바다에 던져졌을 때지. 그 순간 면도날에 베인 것처럼 자각할 수 있어.”


그녀의 손목을 본 것은 그때였다. 줄이 죽 그어진 상흔이 문신처럼 남아 있었다. 나중에 그녀와 친했던 복학생을 통해 사연을 전해 들었다. 이전에 실연의 후유증으로 자살을 기도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득이 한 학년을 쉬게 되었다는 것이다. 버스 맨 뒷자리에서 대화를 나눴던 그날 이후 나는 그녀와 다시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수업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한 번 인사를 나눈 게 전부였다. 그녀가 자신의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내가 군에 갔다가 복학하고 나서였다. 그녀가 경험했던 고통이 그녀를 다시 집어삼켰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구나 과거에 경험했던 고통과 시련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억 속의 고통이다. 당시에 생생히 느꼈던 날것의 그 고통은 아니다. 고통도 잊힌다. 마찬가지로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을 언젠가 미래의 내가 기억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고통의 기억은 있지만 고통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은 현재형이고 그것은 오롯이 지금 현재 나만의 것이다. 과거의 나도 미래의 나도 현재의 내 고통을 진실로 알지 못한다. 오직 지금의 나만 현존하는 고통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종종 과거의 고통을 잊는다. 그래서 실수는 반복되고 자각은 쉬 잊힌다. 고통이 잊히지 않는다면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부차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그 힘든 ‘와신상담’을 왜 했겠는가. 그는 복수의 실현을 위해 고통이 관념으로 기억되지 않게 하려고 고통을 끊임없이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구현해 내야만 했다.


우리가 부차처럼 고통을 잊지 못하고 생생히 기억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라면 삶은 지옥 그 자체일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고통스러운 삶을 그나마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망각 때문일 것이다.


일주일간 수액을 꽂고 살았다. 화장실을 가도 복도를 걸어도 병원 뜰을 거닐어도 항상 내 몸은 수액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신생아의 탯줄을 자르듯, 퇴원할 때 수액 바늘을 뽑았다. 나는 수면으로 떠오르는 ‘그랑블루’의 자크처럼 또다시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나의 고통은 나만의 것’이라는 진단서를 들고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는 조만간 시시덕거리고 미워하고 사랑하며 화내고 슬퍼하느라 그 진단서를 어디에 던져버렸는지도 까맣게 잊을 것이다. 그렇게 어리석기에 인생은 또한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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