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구절초 꽃밭에서 주민들과 함께 잡초 제거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풀들이 꽃모종과 뒤엉켜 구분이 어려웠다. 작업속도는 자연 더딜 수밖에 없었다. 다들 힘들다며 투덜댔고 꽃밭이 얼마쯤 남았는지 연신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그러자 봉사에 참여한 주민 한 분이 말했다.
“내가 어릴 적 시골에서 엄마랑 밭에 나가 일을 할 때면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었는데 ‘밭일을 할 때는 끝을 보지 마라’였어요.”
힘든 일을 할 때 끝이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지면 질려서 하기가 싫거나 심지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니 그것을 경계하라는 말씀이리라. 공부할 때 책상 위에 모든 과목의 책들을 잔뜩 쌓아두고 하면 하기 싫어지므로 지금 하고자 하는 책만 꺼내서 해야 한다는 학창 시절 선생님의 말씀도 생각났다. 삶의 지혜는 늘 작고 평범한 곳에 있는 듯하다.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해서 그렇지.
어쨌든 투덜거리며 고개를 자주 들어 얼마나 남았나 살피던 사람들도 더 이상 쳐다보지 않고 열심히 자기 앞의 풀만 뽑았다. 남녀가 뒤섞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넓은 꽃밭 속에서 마치 풀을 뜯는 염소무리처럼 잡초를 야금야금 제거해 나갔다. 질펀한 농담도 주고받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이윽고 우리 모두는 꽃밭의 끝에 다다랐다. 한 시간 넘게 허리를 숙이고 작업한 뒤였다. 그때 노래 하나가 떠올랐다.
첫 직장생활에서 적응이 쉽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도 일은 고되고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따분하고 힘든 일을 수십 년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출근하고 싶지 않았다. 번아웃이 찾아왔던 것이다. 힘이 들수록 나는 자꾸 고개를 들어서 끝을 살폈다. 퇴직을 앞둔 직장 상사의 코뚜레에 꿰인 늙은 소처럼 찌든 모습을 보니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즐겁지는 않더라도 내게 맞는 보다 나은 일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온통 지배했다. 끌어주고 밀어주며 진심을 나눌 동료도 곁에 없었다. 결국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재취업은 쉽지 않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랐다. 직장 스트레스는 사라졌지만 또 다른 길을 어서 찾아야만 한다는 심적인 압박이 무겁게 찾아왔다. 그러던 중 아내가 될 사람을 천운처럼 만나게 되었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고 알아봐 주었고 인내하면서 곁을 지켜주었다. 삶의 고비를 나는 그렇게 넘기고 있었다.
“이제 한 걸음, 한 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그녀의 노래를 들은 건 2018년 동평양극장에서 열린 ‘봄이 온다’ 공연을 방송한 티브이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인생의 힘든 오르막길을 이제 시작하려는 연인의 이야기가 정인 특유의 애절한 창법으로 내 가슴을 울렸다. 풀리지 않던 남북의 관계가 복선처럼 느껴졌을까. 아니면 철새만이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을 뿐, 철 지난 이념이 갈라놓고 대립하고 있는 이 땅의 엄혹한 현실이 갑갑해서였을까.
“귀를 먹먹하게 하는 총소리와 폭탄 터지는 소리. 그리고 갑자기 쓰러져 죽는 전우들. 나는 그때 갓 스무 살에 아이 하나 딸린 아버지였지. 아비규환의 지옥 같은 첫 전투가 지난 후 용케 살아남았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바지는 오줌으로 흠뻑 젖어 있었네.”
몇 년 전 돌아가신 장인이 6.25 전쟁에서 직접 겪었던 전투 경험을 내게 솔직하게 고백하시던 말씀이 생각난 건 우크라이나와 최근의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마주 하면서였다. 울부짖는 아이들과 부녀자들.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삶의 터전. 극한의 두려움과 어찌해야 할지 모를 막막함에 넋을 잃은 사람들의 눈망울들. 왜 인간들은 이토록 참혹한 전쟁을 계속해야만 하는지. 분노와 안타까움과 허망함에 깊어가는 가을하늘을 바라봐도 맘이 썩 편하지 않았다.
대안 없이 사표를 던진 젊은 만용. 들어선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용감하게도 굳이 앞길이 불투명하고 고된 나를 택했고 손길을 끝내 놓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걸으니 어둠 속에서도 외롭지 않았다. 끝이 없어 보이던 가파른 오르막은 어느새 사라지고 있었다.
“일생을 살면서 한 번도 전쟁을 겪지 않는다는 건 큰 복이지 싶어.”
화면으로 비치는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던 아내가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사실 누구나 전쟁 중이다. 우리 머릿속에서는 각종 재난이나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 그리고 갈등이 뒤엉켜 혼전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마다 때로는 작게 때로는 크게. 우리 마음이 항상 겪는 일이다. 겉모습은 다들 평온해 보일지라도.
고통과 씨름을 해야 한다면 제발 영원하게 느껴지는 아득한 끝은 보지 말기를. 지금의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고 웃음을 찾으며 함께 걷는다면 어느새 평온함은 발아래 펼쳐지리니.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곳, 평화의 광장에 모두 이를 수 있기를 바라본다.
여름 내내 잡초에 시달렸던 구절초들이 바람에 하늘거리며 활짝 꽃을 피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