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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정원 Dec 31. 2023

색으로 물들다

아침 식사시간, 샐러드 속에 든 당근을 먹으며 아내가 말했다.


“토끼가 당근을 좋아하잖아. 이거 너무 많이 먹으면 토끼처럼 눈이 빨개지는 거 아냐?”


토끼의 눈이 붉은 것은 당근을 많이 먹어서가 아니라 홍채에 색이 없기 때문에 피가 비쳐서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한다. 모든 토끼가 눈이 빨간 건 아니고 갈색이나 검은색 눈을 가진 토끼도 있다 한다.


사실 토끼는 당근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린 토끼의 경우 당근을 먹으면 해롭다고 한다. 토끼가 당근을 좋아한다는 오해는 오래전 만화 캐릭터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영국의 어느 20대 여성이 하루에 당근을 10개 이상씩 먹었더니 얼굴이 붉어져서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원인은 ‘카로틴혈증’ 증후군으로 얼굴색이 붉게 변한 것이었단다. 많은 양의 당근을 섭취하면 그 속에 함유된 카로틴 성분이 얼굴 피부를 붉게 물들인다는 것이다. 카로틴은 당근을 비롯해서 수박이나 토마토에도 들어있는 자연 염료다.


얼굴에 화장을 하고 손발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며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피부에 타투를 하는 것 등은 몸 바깥에서 물리적으로 이뤄지는 ‘색칠’이다. 하지만 당근을 많이 먹어서 카로틴 성분 때문에 얼굴이 붉어진다는 것은 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변화라 그런지 색다르게 느껴졌다.


홍학을 처음 본 날이 선명히 기억난다. 어릴 적 동물원에서 보았던 강렬한 인상을 잊을 수 없다. 온통 핑크빛의 우아한 자태를 한 새들이 무리 지어서 연못을 거니는 모습은 마치 발레단의 공연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홍학은 주로 게나 새우 등을 먹고사는데 이러한 먹이를 주지 않으면 온몸의 깃털이 핑크빛에서 흰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홍학이 백학이 되는 것이다. 홍학의 깃털이 붉은 이유는 태생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주요 먹이인 갑각류 속에 존재하는 카로티노이드계인 아스타신 성분이 깃털을 붉게 물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동물들의 신체 색깔은 염색체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신비롭게도 홍학은 먹이로 인해 깃털 색깔이 좌우된다고 하니 놀랍다. 당근을 먹어서 얼굴이 붉어진 영국 여성처럼.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겠다.”


18세기말 프랑스의 사법관이자 문인이었고 또한 미식가였던 앙텔름 브리야 사바랭의 말이다. 홍학처럼 사람들도 무엇을 주로 먹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습성이나 삶의 패턴 그리고 사회적 계층 등을 유추해 볼 수 있다는 그만의 자신감의 표현일 것이다. 그도 알았을까. 우리가 관계를 먹고산다는 것을. 그럼 나는 어떤 관계를 먹고 살아왔나?


인류는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관계 속에 있을 때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무리 속에 ‘자기가축화’하는 방식으로 적응했고 집단 내에서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명을 이어왔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관계 속에서 눈치를 보며 집과 직장을 오가는 ‘가축’이다.


심리학자들의 실험에서 피실험자의 상당수는 타인들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엉터리로 주장해도, 설혹 그것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도 잘못된 의견에 따른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공포감과 두려운 감정은 무리 내 구성원 사이에서는 급속히 전파된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가 집단 내에서 타인들로부터 받는 영향에 관한 연구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


영국왕립학회 수석연구원을 지낸 마이클 본드는 나의 생각이나 감정은 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타인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은 MBTI를 물어보고 서로를 파악한다지만, 오래전부터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와 잘 어울리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는지 그리고 어떤 부모 밑에서 자라났는지 살펴보면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유추해 왔다.


‘근주자적(近珠者赤) 근묵자흑(近墨者黑)’


서진의 문신 부현이 편찬한 잠언집 태자소부잠(太子少傅箴)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유래는 몰라도 학창 시절에 배워서 익히 아는 문장이다. 붉은색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붉어지고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어진다는 고사성어다. 이와 유사한 경구는 여러 민족과 문화 그리고 종교에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의미는 모두 동일하다. 즉, 악한 사람을 멀리하고 선한 사람을 가까이하라는 말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고받는 영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며칠 전 직장 동료가 내게 물었다. “새해에는 무슨 계획을 세우셨나요?”


왜 계획이 없겠냐마는 자기 계발을 위한 계획은 계획만으로 귀결되고 마는 경우를 반복해서 경험하다 보니 오히려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나 열패감만 남게 되는 부작용이 생기는 것 같다. 남들을 이기기 위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저마다 열심히 계획을 세운다. 나도 그랬다.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낙오될 것 같아서 강박적으로 남들처럼 뭔가를 억지로 만들었다.


만고땡으로 사는 사람을 비웃으며 수습도 안 될 일들을 부산하게 벌였다. 남들 장에 갈 때 거름이라도 짊어지고 따라나섰다. 그래야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인 것처럼 여기며 어리석게 매달렸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보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 둘 해보자는 생각을 가지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엉뚱한 방향으로 멀리 가면 돌아오기도 힘들어지는 법이다. 제대로 가면 천천히 가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요즈음이다.


매년 2월에서 3월경이면 인도 전역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홀리' 축제가 열린다. 새로운 봄을 축하하며 사람들이 서로 색 가루나 색 물감을 얼굴이나 몸에 바르고 뿌리며 복을 비는 행사다. 동심으로 돌아가 붉고 푸른 물감을 서로에게 물들이며 신나게 즐기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흥겨움을 느끼게 한다. 나와 남 그리고 모두가 거대한 색으로 둔갑하여 미친 듯이 춤추는 모습. 이때만큼은 나이도, 성별도, 직위도, 계급도 의미가 없다. 삶을 즐기는 인간 그 자체만 있을 뿐.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시각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위적인 예술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집단을 이루고 문명을 쌓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영향을 주고받는 우리들의 숨겨진 단면이 홀연히 화려한 색감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다채로운 색깔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자신만의 색을 서로 공유하는 일일 것이다. 일터와 가정, 그리고 각종 집단 속에 살아가며 우리는 저마다의 색을 나누는 축제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즐겁지 않을까.


겉으로 드러난 모양에 압도되고 자신의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각자 괴로움의 심연이 너무도 깊고 엄혹해서 이면을 들여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인생이라는 축제는 시작되었는데 어떤 이는 검은색을 바르고 어떤 이는 붉은색을 뿌린다. 자신의 색이 검정인지, 붉은색인지도 모른 채. 붉은 망토를 둘러도 검고, 검은 망토를 둘러도 붉은 사람들이 많다. 때로는 붉은색을 때로는 검은색을 남들에게 뿌려대기도 하면서 우리는 저마다 자신을 합리화하며 살아간다.


부정한 소리를 들으면 귀를 씻곤 했다는 조선의 왕 영조처럼 새해에는 타인들의 좋지 않은 언행들은 멀리하자고, 나의 말과 행동에서 어두운 것들은 없는지 돌아보고 또 조심하자고. 낡았지만 새로운 다짐을 올해의 계획으로 삼고자 한다.


새해의 계획이 무언지 내게 물었던 직원이 이번 인사발령에 새로운 임지로 떠난다. 홍학처럼 붉은 그에게 늦었지만 나의 그런 노란 '결심'을 답으로 전한다. 그의 앞날이 우아하고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바라면서.


아침 식사시간, 식탁을 마주하고서 '당근을 많이 먹으면 토끼처럼 눈이 빨개지냐'며 아이같이 묻는 아내의 질문에 나는 대답했다.


“내가 사람이 된 건 당신의 고운 색에 물들어서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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