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밥을 먹는데 갑자기 ‘우두둑’ 소리가 났다. 바로 내 입안에서였다. 아내는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희한하네. 요즘 쌀에는 돌이 잘 없는데 어쩌다 한 번 들어가는 돌도 꼭 당신 밥에 들어가.”
나는 입안을 물로 씻고 돌아오면서 어릴 때 가족들과 함께했던 밥상을 떠올렸다. 저녁 식사는 다 같이하지 못해도 아침은 모두 큰 상에 둘러앉아서 먹었다. 밥때를 알리는 건 언제나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 진지 드세요. 얘들아 어서 와.”
가족들이 하나둘 안방으로 모였다. 반찬 냄새, 밥과 국에서 하얗게 오르는 김. 큰 상을 펴도 비좁아서 식구들은 무릎을 서로 다닥다닥 붙여 앉았다. 숟가락이 국그릇에 부딪혀 ‘팅’하고 울리는 소리, 쩝쩝 씹는 소리, 꿀꺽 삼키는 소리, 대화 없이 들리는 익숙한 소리들이 침묵을 대신하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훈시 말씀처럼 아버지의 밥상머리 교육이 시작되려는 찰나, ‘우두둑’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채석장에서 바위를 깨뜨릴 때 나는 소리처럼 큼지막하게. 식구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의 근원지인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결재문서에서 오타를 지적당한 부하직원처럼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몇 번이고 조리로 인다고 일었는데도 들어갔네.”
그 시절 방앗간에서 찧은 쌀들은 돌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도정기술이 발달해서 쌀에 돌이 없지만 그때는 쌀을 씻을 때 조리로 일면서 그 속에든 돌을 일일이 손으로 골라내야 했다. 밥 한 번 할 때 걸러진 돌들을 모으면 티스푼에 담길 정도였다. 사람의 일이다 보니 완벽할 리가 없고 걸러지지 않은 돌들은 누군가의 밥에 들어가서 ‘우두둑’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바깥으로 나가서 입안의 돌을 뱉고 돌아온 아버지의 언짢은 얼굴을 보며 할머니가 거들었다.
“아니 왜 돌은 꼭 니 밥에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너무 세게 씹는 거 아이가? 살살 좀 씹지. 이빨 부러지것다. 개안나?” 그러자 아버지가 어머니를 향해 핀잔하듯 말했다.
“맨날 하는 밥인데 우째 이리 돌을 못 고르노? 내가 학교 다니면서 자취할 때는 밥을 직접 해 먹었는데 그때는 돌 씹을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자 어머니를 대신해서 할머니가 맞받았다.
“그라모 밥 안치는 거는 니가 좀 해도고.”
우리는 밥알이 튈 만큼 통쾌하게 웃었다. 당시 가부장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을 시기여서 아버지가 어렵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런 조그만 반전에도 어린 우리들은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 저명한 과학자가 말했다. 사람의 뼈도 사실상 돌의 일종이라고. 석영 등 모래로 이뤄지면 사암, 탄산칼슘으로 이뤄지면 석회암, 석영과 장석류를 주성분으로 이뤄지면 화강암이 되듯이 사람의 뼈와 치아도 칼슘과 인 그리고 유기질의 합성으로 이뤄져 있는 암석이라는 것이다. 돌을 씹어서 부스러뜨리는 이빨도 돌이다.
사람은 돌을 생산한다. 뼈와 이빨은 물론이고 귀에서는 이석, 신장에서는 결석, 요도에서는 요석을 만들고 스님은 사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머리 나쁜 사람들을 종종 돌머리라고 놀리는데 사실 우리 모두는 돌머리다. 뇌를 둘러싼 두개골 자체가 돌이니까. 돌머리가 다른 돌머리를 ‘돌머리’라고 놀리는 격이다. 바보가 바보를 놀리듯이.
19세기 인도의 어느 사상가가 설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돌인형, 헝겊인형, 소금인형이 여행을 하다가 바다를 만났다고 한다. 세 인형은 바다를 건너야만 했다. 돌인형은 물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렸고 헝겊인형은 물을 잔뜩 머금고 부풀어서 둥둥 떠다녔다. 반면에 소금인형은 서서히 녹아서 바닷물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가 이야기를 통해 전하려 한 뜻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밖에 모르고 진리에 귀를 닫고 살면 돌처럼 가라앉거나 헝겊처럼 둥둥 떠다니게 된다는 것. 나와 남, 나와 세상을 물에 녹아든 소금처럼 하나로 여길 수 있다면 온갖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이리라.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만났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생각난다. 조선 정조 때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중국에 다녀와서 기록한 견문록이다. 그중에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는 황제의 생일잔치에 늦지 않기 위해서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너야 했던 이야기다. 밤중에 강을 건너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무서운 일이자 큰 고역이었을 것이다. 두려움의 늪에서 그는 문득 생각을 바꿨다. 강물이 곧 자신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졌고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살아가면서 두려운 일이 생길 때면 나는 종종 그 대목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리석은 미망에 사로잡혀 괴로운 인생을 살아왔다. 바다 같은 세상 속에 태어나 돌인형처럼 경계 짓고 진리에 귀 닫은 채 무겁게 가라앉기만 했다. 때로는 헝겊인형처럼 허영과 망상에 젖고 부풀어 파도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떠다녔다. 남들이 만든 척도를 기준 삼아 기대에 못 미치는 나를 원망하고 비하하며 노새처럼 생의 언덕을 터덜터덜 힘들게 넘어왔다.
세찬 강물을 건너던 연암처럼, 깊은 바다를 건너던 소금인형처럼 에고(ego)를 부여잡은 손목의 힘을 빼고 조금씩 조금씩 녹아들고 싶다. 별것도 아닌 일에 화가 끓어오르거나 외롭고 슬프고 지겹고 두려운 감정에 스스로 무겁게 가라앉기만 하는 나는 언제쯤 녹아서 가벼워질 수 있을까.
“아, 나는 돌인가 봐.” 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혼자 중얼거리자 그 소리를 들은 아내가 말했다.
“이제 알았어? 그렇지만 당신 옆에 내가 있잖아.” 하고 미소 지었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나는 이생에서는 소금처럼 물에 녹아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피그말리온처럼 못난 나를 무시로 사랑해 주는 아내가 있으니 알 수 없다. 어느 순간 ‘사람’이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