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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백삼홈 Jun 03. 2022

12년 만에 쓰는 며느리 해방 일지 2.

시어머니를 모시는 세상의 모든 며느리를 추앙합니다.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너무 열어줬어.

괜찮을 땐 괜찮은데 싫을 땐 눈앞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

말하면 더 싫고 쓸데없는 말인데 들어줘야 되고, 무슨 말을 해야 되나 생각해 내야 하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야.

<나의 해방 일지_글, 사진 jtbc>




# 며느리 해방 일지 2.


처음부터 시어머니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 맞벌이 시절 집안일에 심지어 며느리 옷도 다려주시고,  맛있는 음식도 늘 해주셨다.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 남편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많이 웃었다. 무엇보다 장사하시며 고생하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애잔했다. 서로에게  애틋했던 감정들이 스쳐간 시간도 있었다.


첫 갈등은 아마도 친정 문제였던 것 같다.  시골에 사시는 친정부모님이 계시니 명절의 설은 시댁에서 보내고, 추석은 친정에서 보내기로 남편과 합의한 내용에 대한 불만이셨다. 이유는 시댁을 얼마나 무시하면 그런 생각을 하냐였다. 제사도 안 지내고 아무것도 안 하는 시댁인데 명절에 그저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큰 소리리가 나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그 이후 결혼 후 명절에 단 한 번도 친정에 가지 않았다. 아이가 어려서, 시어머니가 명절에 혼자 계셔서, 너무 멀어서 갖은 핑계를 댔다. 남편은 명절만 되면 눈치를 봤고, 그런 남편의 마음도 무시하고 내 멋대로 그냥 안갔다.

 어쩌면 단 한번도 '명절에 친정에 한번 와라 '라고 말하지 않았던 친정에 대한 서운함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배려가 나를 더 속상하게 했고, 늘 요구만 받고 살고 있는데, 남편이나 시댁에 단 한 번도 요구라는 걸 해본 적 없는 친정식구들에게 짜증이 났었다. 


갈등의 불씨는 첫 아이 임신 때였다. 자고로 임산부 호르몬을 안 겪어 본 사람에게 감히 한마디로 표현하면 감정이 도-도까지 종일 오선지 위에서 꽃 꼽고 춤추고 있는 듯한 감정선이 생긴다. 일분 사이에도 나의 감정은 도솔 도시 도레미파솔.. 대상에 상관없이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서운함이 들었다. 특히 함께 살고 있으니 남편과 시어머님이 일등자리를 놓고 박빙이었으리라. 임신한 동생을 보러 온 처음 집에 온 친정 언니에게 음료도 대접하지 않고, 갑자기 청소기를 돌리고 상황에돌리는가 하면 상황에 맞지 않은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셨다. 


그렇게 조금씩 고부 사이에는 미묘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이든 미세한 균열이 일어날 때 문제점을파악해서 보수하지 않으면 결국 큰 화를 입게 되기 마련이다. 대인관계도 그렇다. 결국,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고, 아픔이 되었고, 해방을 꿈꾸게 하였다. 어쩌면 시어머니도 마음 속에서 시어머니 해방일지를 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갈등의 절정은 첫아이를 낳고 퇴사를 하면서 였다. 한 부엌 두 여자의 미묘한 싸움은 본격화됐다. 별일 아닌 것에 예민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주 사소한 문제가 늘 큰 문제가 되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며느리랑 다투기라도 하면 시어머니는 직장에 있는 남편에게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를 해서 문제를 키웠다. 싸움은 늘 입장차가 있듯이 같은 말을 다르게 전달하는 시어머니의 언어전달로 인해 그때는 남편과 다툼도 잦았다. 원래가 내가 누구랑 그렇게 잘 싸우는 사람이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자주 다퉜다. 시모와의 다툼이 말이 되냐 질책한다면 받아 마땅하다. 예의 없음을 장착하고 했던 말들이 시어머니에게도 상처였겠지만 결국 그 상처들은 돌고 돌아 나에게 돌아왔음을 알고도 그땐 그말이라도 해야  살 수 있었던 날들이 있었다.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대사처럼 시어머니와 다투는 일, 대화하는 일, 서로를 바로보는 일들이 어느새 노동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왔다. 그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했기에 입을 닫고 또 닫았다. 최대한 얼굴 마주할 일을 피했다. 그 후로 언쟁은 없어졌고 조용해졌다 느껴지겠지만, 그럴수록 마음 문은 빛줄기 하나 새어 나갈 수 없게 굳게 닫혀 버렸다. 입과 동시에 마음의 문도 점점 더 철저히 닫혀갔다.


어쩌면 새로운 동네로 이사와 친구 하나 없는 시어머니에게 살갑게 대하지 못했고, 공경하지 못했다. 서로 힘듬에 대해 나누고, 공감하지 못함으로써 시어머니를 더욱 외롭게 했을 것이다. 평생 하던 집안일을 하루아침에 며느리에게 뺏아긴 느낌이 들었을 것이고, 심지어 늘 챙겨주던 아들이 결혼까지 해 다른 여자를 더 사랑하는 듯 느껴지니 샘이 났을 수 도 있다. 무엇보다 하루 종일 같이 한 집에 있는 며느리와 대화를 많이 하지 않고 사는 일로 많이 외롭고, 우울했을 것이다.   

치매 전에 우울증이 왔을 때, 우울증에 걸린 시어머니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쉽지 않았고, 더 관계가 나빠지는 격이 되는 일들이 많아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시어머니의 우울증과 산후 우울증이 동시에 왔던 것 같다. 시어머니의 우울증을 아들보다 먼저 발견해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왔다. 반면, 나는 나를 돌보지 못했던 것 같다. 원하던 퇴사였지만 일을 잃은 공허함, 시어머니 시집살이, 어린아이 키우는 일에 마음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때의 나도 극도로 심한 산후 우울증이 아니였을까? 시어머니처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면 해방을 꿈꾸기 전에 평화협정정도는 맺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남는다.


이런 두 여자 사이에 남편은 다분히 노력 했다. 하지만 두 여자의 마음을 알리 없는 남편의 노력은 실패했고, 꼬인 실타래 처럼 풀지 못했다. 세월의 내공이 없던 남편에게도 힘든 고난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모두 대화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모두 실패했다. 대화 할 수 없음이 얼마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몸소 느끼게 되었다.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자주 하는 말들이 있다. "내 인생을 드라마로 쓰면, 저것보다 더하지 덜 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외에 갈등을 유발하는 인물이 반드시 등장하게 된다. 내 삶에서도 예외가 아니였다. 시어머님과 내가 더 멀어질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결국, 해방을 꿈꾸게 해준 이가 나에게도 있었다.


<며느리 해방 일지 3.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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