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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백삼홈 Aug 24. 2021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 여자라고 했다.

남편이 지어준 나의 별명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 여자"

청소기를 밀지 않으면 하루 종일 세수를 안 한 느낌이다.

설거지가 쌓여 있던 적이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이다.

이틀에 한 번은 밑반찬을 만든다.

매일 솥밥을 한다.

햇살이 좋은 날은 이방 저 방 돌려가며 이불 빨래를 한다.

집밥에 대한 이유 없는 강박에 주중 외식을 잘하지 않은 편이다.

주말에도 주방은 닫히는 법이 없다. 여행을 가지 않는 이상 주방은 상시 운행 중이다.

하루 종일 24시간 무엇이든 하고 있다.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100%라고 하면 120% 이상은 쓰고 매일 살고 있는 듯한다.

누군가의 강요와 협박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면서 스스로를 쉬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걸 결혼하고 깨달았다.

남편은 이런 나에게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 여자", "하루에 집에서 만보 걷는 여자"라는 우스꽝스러운 말을 한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라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는다. 사실 이런 말 하는데 이유가 있다. 체력이 엄청나게 부실하다. 부실이 이런 부실이가 없을 정도로 저질체력이라 잠이 드는 순간 매일 끙끙대면서도 다음날 오뚝이처럼 일어나 언제 그랬나는 듯이 벌떡 일어난다. 피곤한 날도 아픈 날도 좋은 날도 매일 같은 일상 루틴이다.


 직장 다니면서도 퇴근 후에 첫째의 이유식을 매일 밤늦게까지 만들었었고, 퇴사를 하고 본격적인 육아를 하면서도 평소에 낮잠을 자거나 바닥에 등을 붙여 눕는 법이 거의 없었다. 하루 종일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 댔다.

한때는 미니멀 라이프에 심취되어 매일 버리는 삶을 살았고, 지금도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지만 물욕 가득한 나로서는 어려운 일이라 그 흉내만 내며 틈틈이 버린다. 버리고 나니 정리병이 돋았다. 매일 구역을 나누어 정리를 한다. 공중화장실에 가면 청소표가 붙여있듯 집안의 청소표를 만들어가며 청소를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대문도 닦고 신발장도 주기적으로 닦는다. 우리 집 현관 앞에는 마스크 쓰레기통 하나와 슬리퍼 하나가 전부이다. 집에 다녀간 지인들은 '모델하우스야? 10년 된 집 맞아?'라는 말을 가끔 듣곤 하지만 아이들의 장난감은 아무리 치워도 깨끗하게 정리하기 어려워 아이방은 포기한 지 오래고, 집안 한 군데 정도는 처박는 곳이 나에게도 있긴 하다. 이렇게 보면 굉장히 깨끗하게 정리된 집일 거라고  상상되겠지만 막상 열어보면 다른 집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남편도 깔끔한 편이다. 설거지한 후 정리는 웬만한 주부보다 낫고, 잘 도와주고 정리를 잘하지만 성에 안찬 건 어쩔 수 없다. 정리에 취미가 없는 아들과 7살 딸아이가 유치원에서 만들어 오는 어메이징한 예쁜 쓰레기들은 자신에게 너무 소중하다고 하니 마음대로 정리할 수 없어 집안 정리에 가장 큰 어려움을 준다.

 

 매일 정리만 하는 건 아니다. 이미 수많은 시간 정리된 집이라 집안을 정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는다.

9시 이전에 식구들이 모두 출근하면 저녁 식사 준비와 청소 등을 하며 11시 이전에 집안일은 끝이 난다. 핵심은 집안일이 끝나면 조금 쉬어야 하는데 또다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 책 읽기, 각종 취미생활의 사부작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하원하고 오면 조용히 하고 싶은 일을 못하니 업무 처리하듯 폭풍처럼 한다.

아이들 하원 후에는 공부도 봐주고, 간식도 챙겨주고 놀아도 주고 그러다 보면 저녁이 되고, 저녁 준비를 하고 정리하면 8시가 된다. 8시부터는 남편과 아이들과 보내는 꿀 시간이라 함께 보내는데 최선을 다 한다. 아이들 잘 준비를 시키고 불을 끄고 나오면 10시쯤 되는데 이제부터 다시 남은 하루가 시작된다. 오전에 끝내지 못했던 글이나 책을 읽고, 남편과 영화를 보거나 수다를 떨다 보면 잠잘 시간이다. 이렇게 글로 나열해 보니 남편이 말한 것처럼 정말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 여자 같다.


이런 행동들은 약간의 강박증상이긴 하다. 학교 다닐  두껍고 비싸기도 했던 DSM-5* 오랜만에 열어 보았다. 찾아보니 강박장애에 가까우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정도는 아니니 장애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냥 강박행동**중에 속하기는 하는  같다.  일종의 정신적인 문제라도 치부해 버릴까 생각하다가도 이제는 조금 행동수정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남편의 말이 단순히 웃고 넘길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신체나이도 세월을 역주행할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먼저, 청소 표는 일단 떼자. 이미 머릿속에 찍혀 있지만 일단 치우자.

밑반찬은 이틀에서 삼일로 바꾸자.

매번 솥밥을 하지 말고 가끔 햇반도 이용하자.

입구에 신발이 좀 나와 있더라도 그냥 지나쳐보자.

아이들의 물건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도 눈 꼭 감고 무시해버리자.

하루에 2회 이상 등을 붙이고 바닥에 눕자.

집안일을 마치면 반드시 30분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 보자.


일단 간단한 목표는 세웠는데 실행 가능한 목표인지는 모르겠다. 또 다른 목표를 실행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든다. 그냥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 여자'콘셉트로 살아가는 방법을 강구하는 게 더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다. 지금 사는 모습 그대로 살아도 몸도 마음도 건강해질 수 있는 신묘한 약 개발에 누군가 힘써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

**강박행동 :  강박행동에는 예를 들어 손 씻기, 정리 정돈하기, 확인하기와 같은 반복적인 행동과 기도하기, 숫자 세기, 속으로 단어 반복하기 등과 같은 정신적인 행위도 포함된다. 강박행동은 자신이 경험하는 강박사고에 대한 반응으로 수행하게 되거나 엄격한 규칙에 따라 수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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