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과수원 길>의 기억

by 와이

어릴 적 살던 아파트 단지의 출입구에는 장미꽃이 심겨 있었다. 흰색 페인트로 칠해진 출입구 앞에는 여름이 되면 새빨갛고 커다란 장미가 내 키보다도 크게 피어나곤 했다. 꽃도 예뻤지만 내 관심은 그 줄기에 달린 큼직한 장미 가시에 있었다. 그 장미 가시는 어린아이의 손가락으로도 똑 따질 만큼 튼실했다. 나는 가시를 따서 침을 발라 콧등 위에 올려놓고는 코뿔소를 흉내 내곤 했다. 쓸데없는 놀이였지만, 그 큼지막한 가시를 콧잔등 위에 올려놓으면 바보 같으면서도 우쭐한 기분이 들곤 했다. 콧잔등 위의 가시를 보겠다고 일부러 눈을 모으는 장난도 쳤다. 그러다 침이 말라 가시가 떨어져 나가면 새로 가시를 땄다.


어느 날은 아빠와 함께 네발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비교적 사람의 출입이 많은, 출입구가 있는 통로에서 출발해 사람이 비교적 없는 베란다 쪽의 통로를 지나 아파트 건물을 한 바퀴를 도는 식이었다. 아빠의 배웅을 받으며 출입구에서 출발해 으슥한 뒷길을 홀로 지나고 있는데 웬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동네 길을 묻더니 나에게 과자를 사 줄 테니 따라오겠냐는 식으로 물어봤다.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유괴를 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때에는 그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과자 생각이 없어서 거절했다. 유괴범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어린애 치고는 과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정말 과자를 사주겠다는 제안이 끌리지 않았다. 그러자 아저씨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어른의 제안을 거절한 게 민망해서 서둘러 자전거를 다시 타고 떠났다. 그러고 돌아서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등 뒤가 무서워졌다. 서툰 페달질로 헐레벌떡 출입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빠에게 돌아왔고 이 일을 말했다. 아빠와 다시 돌아간 뒤편 통로에 그 아저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 아파트 단지에 이렇게 바보 같고 무서운 추억만 있는 건 아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도 함께 떠오른다.


그 동네에 처음 살 때에는 슈퍼라고는 정말 동네 슈퍼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큰 길가 상가 건물 지하에 브랜드 슈퍼가 생겼다-'함박웃음 마트'(그 정체가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GS마트의 전신인가보다). 브랜드 슈퍼는 동네 슈퍼와는 달랐다. 온 사방에 밝은 빛과 함께 냉장시설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동네 슈퍼에서는 팔지 않은 물건들도 즐비했다. 엄마와 나는 곧 새로운 슈퍼에서 장보는 데 푹 빠졌다. 단순한 핑크색 선의 '함박 웃음'이 그려진 슈퍼의 흰 비닐봉지에 장본 것들을 가득 채우고 나서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무척 신났다.


돌아가는 길, 엄마와 나는 항상 동요를 같이 불렀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아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 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 길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과수원 길>을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엄마는 노래를 막 부르지 않았다. 성악가처럼 최대한 곱게 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엄마가 신경 써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걸 어린 마음에도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실바람 타고 솔- 솔-'의 '솔-' 부분을 길고 예쁘게 부르는 게 관건이었다. 그럼 나도 엄마를 따라서 최대한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고 길게 소리를 내려 애썼다. 그렇게 '솔-'에서 잔뜩 감정을 고조시키고 나면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생긋'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은 사근사근하게 부른다. 그리고 노래 가삿말대로 했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작은 장난이었다. 가끔은 이 장난에 웃음이 터져서 미소가 아닌 파안대소를 해버리고는 했지만. 그렇게 미소를 주고받고 나면 마지막 구절-'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 길'-은 다시 감동적으로 마무리한다.


밤이 어두운 아파트 단지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며, 엄마와 나는 각자 한 손에 하나씩 비닐봉지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가운데 둔 비닐봉지를 나눠 들었다. 그렇게 짐을 나눠 들고 노래를 불렀다. 그날의 걸음 속도나 짐의 무게에 따라 노래는 세 번에서 다섯 번 정도 반복되었다. 길고도 짧은 밤이었다.


<과수원 길>을 자주 부르다 보니, 아카시아꽃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종종 엄마한테 아카시아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향기가 나는지 물었다. 엄마는 산이나 들을 지나가다가 아카시아꽃이 있으면 꼭 나에게 알려주고는 했다. 그런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진짜 아카시아꽃이 어떨지 궁금하긴 했지만 내게 아카시아꽃은 노랫말 속에 등장하는 느낌을 상상하는 것으로 이미 충분했었을까.





살면서 엄마 아빠와 함께 쌓은 추억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감정을 나눴던 다른 다정한 기억도 있지만 아카시아꽃의 추억은 오직 엄마와 나만의 작은 추억이다.

<과수원 길>에 대해서 찾아보니, 실제로는 과수원 주변에는 아카시아 나무를 심지 않는다고 한다. 과수로 가야 할 영양소를 아카시아 나무가 다 가져간다는 것 같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것은 실제로는 아카시아 나무가 아니라 아까시 나무라는 다른 수종이라고 추정한다고.

그러나 아카시아인지 아까시인지는 역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지금도 종종 <과수원 길>을 혼자서 흥얼거린다. 그리고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열심히 노래를 부르던 엄마와 우리가 마주쳤던 눈길 그리고 함께 나눴던 미소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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